21살 흙수저인 내가 여태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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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4 04:52 조회 978회 댓글 0건본문
우선 저는 흙수저입니다.
미래, 생계가 불안정하고 꿈이란거 접은지 오래네요 그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필력이 뛰어나진 않아도 그냥 이런놈도 악으로 버티며 살고있구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1998년 1월 말썽꾸러기 한놈이 태어났습니다.
요 근래 몇년전에 안 사실이지만 저 낳기 전부터 친가, 외가에서 부모님 결혼을 반대하셨다고 하네요.
애기때 기억이 세발자전거 타다가 SUV에 치여서 병원신세 졌을때와 2002월드컵 그리고 미끄럼틀 타다 한살아래 여동생 밀쳐서 팔 부러뜨린 기억, 외가댁 형아들이랑 놀았던기억, 엄마가 끓여주던 라면, 외할머니네 옛날 집 정도 기억나네요.
아마 서너살때 쯤인거같습니다.
이 뒤로는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는걸로 보아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네서 자란거같습니다.
즉, 엄마아빠가 이혼을 하고 저와 여동생이 맡겨진 것이죠.
저는 어릴때부터 워낙 말썽꾸러기인지라 낫에 손가락도 베이고 참 할머니가 마음고생 심했었습니다.
지금 제성격은 완전 소심..;; 어릴때와는 정반대네요.
뭐 아무튼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엄마아빠가 다시 결합하고 또 헤어지고를 몇번이나 반복했던거같습니다.
재결합을 했어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땅치 않으시는건 당연할테니 엄마는 시골에 올때면 할머니 할아버지 몰래 피해서 저와 여동생을 반겨주셨죠.
엄마와 아빠가 종종 와서 저랑 여동생 데리고 놀이공원도 가고 그랬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완전히 결별 하고 난 뒤, 아주 가끔씩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수화기 너머로 "땡구아 엄마야" 라는 목소리가 들렸었죠.
근데 저는 할머니는 매우 엄격하셔서 제가 엄마 보고싶다고 할때마다 "엄마 나쁜사람이다, 만약 엄마가 너를 찾아오거든 대접에 물 담고 방바닥에 쏟은 뒤에 그 물 다 대접에 담으면 만나주겠다 라고 하라고도 하시고 아무튼 할머니는 엄마를 많이 싫어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가올때면 엄마 나쁘다 다신 전화하지 마 이런식으로 세뇌되어서 그렇게 말했던거같습니다.
그 뒤로 전화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엄마아빠가 이혼한 이유는 모르겠네요.
딱히 알고싶지도 않지만요.
3학년 명절때였던거 같습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있는데 할머니가 "놀지만 말고 공부해!" 뭐 이런식으로 말씀을 하셨던거같아요.
그때 이제 아빠가 자꾸 공부하라고 소리치는거 보시고 화가났던거같습니다.
그 즉시 저랑 여동생 데리고 "얘네 내가 가서 키울게" 이러고 차에태워서 춘천가서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현재 제가 살고있는 인천 아빠 집으로 오게되었습니다.
그때는 마냥 행복했었어요.
그토록 보고싶은 아빠를 만났으니 말이죠.
매일매일 2000원씩 주며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하고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인가?지역아동센터 라는곳을 다녔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운영하셨었는데 그곳에서 방과 후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했습니다.
교회도 다녔었어요 4년정도? 물론 기도할때 장난치고 목사님 말씀들을때 지루해하고 했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목사님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쯤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이네요 초등학교5학년때 세계적으로 또 한번 금융위기가 들이닥친 적이있습니다.
이때 아빠는 일자리를 잃고 타고다니던 자동차(그땐 몰랐었지만 다마스였어요 첫차는 티코였었고.)도 중고로 팔고 매일주던 2000원도 가끔가다 주고했었습니다.
아빠는 흔히 말하는 노가다 우리나라말로 표현하자면 일용직을 전전했습니다.
금융위기 이후 집안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졸업당시 졸업앨범비를 못내게 되어 앨범이없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이 뒤로 고등학생때까지 간헐적으로 전기세, 수도세, 도시가스, 통신요금 등등 세금들이 점점 미납되고 가끔가다 전기도 끊기고 겨울에는 가스가 안되서 전기장판틀고 이불 겹겹이 깔고 두꺼운거 덮고자고 그랬었습니다.
가스는 불이 안나오니 휴대용버너로 썼고 365일 거의 라면만 먹었습니다.(그래서 제가 지금 키가 170정도네요ㅠㅠ)
지금도 가스렌지는 안써요 그냥 휴대용 버너써요.
이유는 딱히없어요 그냥 가스렌지 들여놓기 귀찮아서? 아니 부탄가스에 익숙해져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고등학교1학년때까지 매년 방학때마다 저와 여동생은 할아버지네에 가있었습니다.
아빠는 돈번다고 타지로 한달동안 가있었구요.
아무튼 저는이제 중학생이 됩니다.
초등학생때 담임쌤들에게 도움 많이 받고그랬는데 중학생때는 모든 담임쌤들이 도와주시고 이름, 얼굴까지 생생히 기억나네요.
중학생때는 좀 더 성숙해진 시기라서 딱히 에피소드는 없지만 중학교 2학년때 제주도로 수학여행 신청서를 한창 받고있을때였습니다.
아빠한테 제주도 수학여행가야한다고 하니 돈이없어서 못내주겠다고 하더라구요.
뭐 그때까지 저는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중학생때부터 제가 지각을 좀 자주했었는데요.
그래서 중2때 담임쌤은 자주 등굣길에 차타고 저희동네 거쳐서 가시기때문에 저를 태워가주시곤 했습니다.
엄청 젊고 이쁘신 선생님이셨던걸로 기억해요. 애들한테 인기 짱
제 꿈이 이때 자동차 디자이너였는데 디자이너 되면 디자인 한 차 선물해드린다는 약속했던 기억이있네요.
지금은 뭐 돈만 많이버는게 꿈입니다.
어느날 담임쌤 차타고 가는데 제주도 수학여행비 안냈다고 하시길래 저는 그냥 "아빠가 돈이없어서 못내준대요" 라고 말했었습니다.
이땐 쪽팔린거 몰랐습니다.
그러자 쌤이 어느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담임쌤이 부르셔서 교무실에가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저에게 수학여행비에 보태쓰라고 돈을 봉투에 넣어 주셨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땐 정말 순진했던게 지금와서 생각하는거지만 그 어떤 할아버지가 보태주신건 아닌거같아요.
뭐 아무튼 처음으로 비행기도 타보고 제주도도 가보고 좋았던 추억이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3학년이 되고 중학교도 이제 졸업할때가 왔었죠.
근데 이때 역시 졸업앨범비 낼돈이 없어서 졸업앨범을 못샀습니다...
담임쌤이 졸업앨범비 내줄테니 졸업앨범 받아가라고 하셨었죠.
근데 저 정말 이때부터 뭔가 굉장히 쪽팔렸습니다.
그래서 졸업식 날에 중3이라는 놈이! 땡땡이 치고 피시방가서 게임했습니다ㅋㅋㅋㅋㅋㅋ
너무 쪽팔려서 어차피 이제 안볼얼굴들이니까 하고 그냥 안갔어요.
그 뒤로도 며칠간 담임쌤이 졸업앨범 가져가라하셨지만 저는 끝끝내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아 이렇게 보니 졸업앨범 저는 하나도없네요...
저는 학창시절 추억이 앨범이 아닌 제 기억속으로만 간직하고있습니다.
반 친구들 이름 아직도 꽤 많이 기억해요 얼굴도.
기억력이 이리좋은데 공부는 왜 못했을까요ㅇㅅㅇ..
글쓰면서 첫사랑했던 여자애 이름이 기억나네요 성미야~!!
너는 아마 나 기억못하겠지??
저는 이제 고등학생이 됩니다.
하필 중3때 게임에빠져서 공부를 등져버리니 내신등급이 좀 낮은 특성화고에 입학했습니다.
아무튼 고1 1학기때까진 공부 열심히 하자 다짐해서 중상위권정도는 했습니다.
그러다가 2학기때가 되고 저는 사춘기가 왔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학교에서 자유분방하고 흔히 좀 논다는 친구들과 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때 질이 안좋던 애들과는 연 끊고 살고있습니다.
생긴거완 달리 친구가 없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놀랍니다ㅋㅋ)
처음 노래방도 가보고 당구장도 가보고 또 술, 담배를 접하기도...크흠..
뭐 이런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랬던건 맞으니까요 뭐..
학교다니면서 일진애들처럼 막 애들 때리고 하는 학교폭력은 하지않았었어요.
집안 사정도 있거니와 중3때부터 발랄하던 놈이 급 소심해졌으니말이죠.
학창시절 싸워본 경험도 서너번 있을정도로 조용하고 묵묵히 생활했습니다.
건드는 애들도 없었죠.
사춘기가 들고 처음으로 가출도 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집이 최고에요..
자 이제 가장 큰일이 났었던 최근4년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이때가 2014년이죠.
(참고로 학교는 생일이 빨라 1년 빨리들어갔었습니다.)
2014년 이때가 사춘기 절정인데 여친도 사겨보고 뭐 암튼 그랬네요.
얼마 오래가지도 못했습니다. 소심한 성격때문에.
헤어지고나서 알게된 누나를 좋아했는데 그누나는 군인남친이 있었어요.
그 해 4월달 당시 제주도로 수학여행 간다고 한창 들떠있을때였는데 이때 학교를 거의 보름 이상을 안나가고있었습니다.
(이때 참 안타까운 사건이 하나있었죠ㅠㅠ)
암튼 집에도 안들어가고 아빠가 너 어디서 뭐하냐 라고 물을때면 버스비 핑계로 친구네서 생활한다고 변명만 했죠.
사실 집에가기싫었어요 한창 놀때인데 돈이없으니 아빠원망만 커져갔죠.
돈에대한것과 아빠에대한 원망은 중3때부터 있었는데 사춘기를 겪으며 그 파동이 가장 컸던거 같습니다.
친구들 영화보러갈때 옷사입을때 저는 그저 묵묵히 있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담임쌤에게 발각되고 붙잡혀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만, 담넘어서 또 친구네로 도피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아빠가 자퇴서 동의했으니 집들어 오라고해서 집에 들어갔네요.
그리고 아빠친구분이 에어컨 설치하는 일을 하시는데 설치보조로 제가 했었습니다.
실제나이론 17살에 그또래에선 해보지 못했을 중노동? 고노동? 급의 에어컨 설치일을 했으니까요.
배관도 말고 벽에 드릴로 구멍도 뚫고 실외기도 옮기고 겁나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일반 가정집 에어컨 할때도 있었지만 빌딩 같은데가서 덕트도 했고 세종시 가서 천장형 에어컨 30평이상찍 되는거 열 몇개씩 설치하고 그랬습니다.
이 일을 거의 반년동안 했고 그 뒤엔 식당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2015년 어느날이였습니다.
어느 날 큰고모가 오셔서 고모네 형 집을 해준다며 아빠에게 방을빼라고 했어요.
사실 저가 살던 집은 아빠의 집이아닌 큰고모 명의로 된 집이였습니다.
고모부랑 고모랑 아빠에게 집살 돈 모을때까지 살라고 빌려준 집이였죠.
하지만 아빠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하루먹고 하루사는데다가 저랑 여동생 버스비며 세금이며 일당 몇만원으로는 감당이 안될 일이였죠.
이때 고모는 엄청 분노하시고 이제 오갈데 없는 식구는 하루하루 지옥같이 살았습니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하던가요.
친척분들이 돈 조금씩 모아온걸로 도와주셔서 현재 반지하 보증금300 월세25만원 방3개 빌라에 살고있습니다.
이때 아빠가 너무 어렵고 그래서 엄마에게 연락을 했었구요.
사실 엄마가 옛날 번호 그대로 남겨놓았다는게 정말 놀라워요 지금도.
언젠간 연락이 오길 바랬었나봐요.
그뒤로 엄마와 10여년만에 재회를 했구요.
처음만날 때는 엄청 어색했지만 외가 친척분들도 만나고 하면서 점차 친해졌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엄마는 다른 아저씨와 동거하고 계시더라구요.
아..이게 드라마같은데서나 보던 경우가 아니던가. 생각이 됬죠.
그 아저씨와 처음 만나고 그때 매우놀란게 엄마가 자식이 있었다는걸 알고도 그 아저씨가 만났다는거에요.
얘기를 나눠보니 실제로도 엄청 좋으신 분이라서 지금은 별 신경안써요 엄마랑 사이도좋구요.
아무튼 극적인 만남도 하고 이때 저는 놀고있을때여서 엄마가 사촌형한테 부탁해서 외삼촌이 운영하시는 금형공장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이니 18살때네요..
금형공장 여기도 매우 힘들었었어요.
쇳가루 날리고 호이스트라는 자석이 있는데 그걸 조작해서 거대한 쇳덩이를 기계에 셋팅하고 스크류 드릴같은것도 도면애 뚫을 구멍 규격에 맞게 바꿔주고 그러는 보조업무 했습니다.
그때 급여를 최고로 많이받은게 180만원이였습니다.
짧게 3개월 정도 하고 그만뒀습니다 그 나이에 너무 벅찬 일이였어요.
그 뒤로 제작년 2016년에는 자동차 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가서 6개월과정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증 공부를 했습니다,
필기는 합격했는데 실기에서 1개문항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아직 자격증은 필기합격해서 기한이2년이라 앞으로4개월 정도는 더 남아있겠지만 그때 떨어지고 나서 작년 2017년 1월에 LED방등 만드는 공장에 생산직으로 가서 거의 1년동안 일했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자재수급이 안되어 2주가까이 쉴때도 있었고 8월쯤 임금체불때문에 회사 관두고 놀때였습니다.
실상 벌은돈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도 않았었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피시방만 갔었는데 드디어 컴퓨터도 사고 이제 좀 먹고살만해진다 싶었는데 그러다 진짜 자살충동이 일어날만한 일이 있었습니다.(그때걸린 우울증+불면증은 아직도 조금 있네요.)
아빠가 어느날부터 명치쪽이 통증이있고 밥먹다가 말고 화장실가서 토하고 밥도 몇숟갈 뜨지못하고 너무 아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때저는 별일 아니겠거니 했는데 갈수록 그게 점점 더하니 아빠가 혼자 보험에 들고 동네병원가서 엑스레이찍고 진단벋고 했는데 위 용종으로 의심되어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길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위암 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쁘고 귀찮으시더라도 건강검진은 꼭 받아야합니다.)
정말 작년여름 많이 울었습니다.
저렇게 아픈데 수술 못하면 어떡하나.병원비는 어떡하나.
아무튼 9월중순 위암2기로 판정되어 한시름 놓았고 아빠는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병원에 몇주간 입원해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임금체불 되었던 그 공장에 사장님이 일 잘한다고 정직원으로 채용해줄테니 다시 와달라 해서 다시가서 시급7000원받으며 일했었습니다.
참고로 이회사에서 또 임금체불이 되어 작년12월 퇴사했습니다.
명절이 다가왔고 작년추석에 할아버지가 300만원인가를 보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주신 300에 제가 일하면서 좀 모았던 돈 합해봐야 겨우 500만원 내외인데 아빠가 퇴원할때쯤이 고비였습니다.
병원비는 총 합계 1300만원정도 나왔었습니다.
보험을 들긴 했지만 최초 가입 후 일정기간이 지나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그 기간이 지나지 않아서 보험금을 받지 못했었죠.
정말 막막했습니다만 나라에서 지원해줘서 300만원대로 병원비가 내려가서 다행히 병원비 내고 퇴원하고 무슨 임상실험인가? 어떤것때문에 병원측에서 아빠 항암치료 공짜로 받게해줘서 2주간격으로 4달정도 다니다 항암치료는 현재 안받고 있습니다.
아빠 몸상태도 많이좋아지고 해서 한시름 덜어놨지만..올해들어 역대급 두자릿수 시급인상이 되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으나 일자리가 너무 없어서 2주 3주하다가 자재공급이 안된다고 짤리고 현재는 백수신세네요.
아빠도 요 근래에 몸이 많이 회복되고 수술 후 항암치료도 받고 할때 덤핑증후군(설사) 증상도 없어지니 일을 다시나가본다고 하긴하는데 요즘 인력사무소가면 열에 아홉은 그냥 집으로 다시 가야한다고 하더라구요.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지만 21살 미필인 놈을 받아주는곳이 별로없기에 상하차 알바라도 지원해볼까 하는데 그마저도 구하기 힘드네요.
알바 왜 안하냐고 하실분들이 계실거같아 미리 적는거지만 일반 음식점이나 편의점 같은곳은 사실상 파트타임이기에 돈도얼마 안되거든요.
여기까지 제가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도 말못했는데 답답한거 익명으로라도 써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가 걱정이네요.
하루하루 뭐먹고사나 막막합니다.
뭐 그래도 새옹지마라는 말이있듯이 언젠간 해뜰날이 오길 바라고있습니다.
신이 진짜 있다면 로또1등이나 당첨되게해주세요 제발.
미래, 생계가 불안정하고 꿈이란거 접은지 오래네요 그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필력이 뛰어나진 않아도 그냥 이런놈도 악으로 버티며 살고있구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1998년 1월 말썽꾸러기 한놈이 태어났습니다.
요 근래 몇년전에 안 사실이지만 저 낳기 전부터 친가, 외가에서 부모님 결혼을 반대하셨다고 하네요.
애기때 기억이 세발자전거 타다가 SUV에 치여서 병원신세 졌을때와 2002월드컵 그리고 미끄럼틀 타다 한살아래 여동생 밀쳐서 팔 부러뜨린 기억, 외가댁 형아들이랑 놀았던기억, 엄마가 끓여주던 라면, 외할머니네 옛날 집 정도 기억나네요.
아마 서너살때 쯤인거같습니다.
이 뒤로는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는걸로 보아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네서 자란거같습니다.
즉, 엄마아빠가 이혼을 하고 저와 여동생이 맡겨진 것이죠.
저는 어릴때부터 워낙 말썽꾸러기인지라 낫에 손가락도 베이고 참 할머니가 마음고생 심했었습니다.
지금 제성격은 완전 소심..;; 어릴때와는 정반대네요.
뭐 아무튼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엄마아빠가 다시 결합하고 또 헤어지고를 몇번이나 반복했던거같습니다.
재결합을 했어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땅치 않으시는건 당연할테니 엄마는 시골에 올때면 할머니 할아버지 몰래 피해서 저와 여동생을 반겨주셨죠.
엄마와 아빠가 종종 와서 저랑 여동생 데리고 놀이공원도 가고 그랬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완전히 결별 하고 난 뒤, 아주 가끔씩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수화기 너머로 "땡구아 엄마야" 라는 목소리가 들렸었죠.
근데 저는 할머니는 매우 엄격하셔서 제가 엄마 보고싶다고 할때마다 "엄마 나쁜사람이다, 만약 엄마가 너를 찾아오거든 대접에 물 담고 방바닥에 쏟은 뒤에 그 물 다 대접에 담으면 만나주겠다 라고 하라고도 하시고 아무튼 할머니는 엄마를 많이 싫어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가올때면 엄마 나쁘다 다신 전화하지 마 이런식으로 세뇌되어서 그렇게 말했던거같습니다.
그 뒤로 전화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엄마아빠가 이혼한 이유는 모르겠네요.
딱히 알고싶지도 않지만요.
3학년 명절때였던거 같습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있는데 할머니가 "놀지만 말고 공부해!" 뭐 이런식으로 말씀을 하셨던거같아요.
그때 이제 아빠가 자꾸 공부하라고 소리치는거 보시고 화가났던거같습니다.
그 즉시 저랑 여동생 데리고 "얘네 내가 가서 키울게" 이러고 차에태워서 춘천가서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현재 제가 살고있는 인천 아빠 집으로 오게되었습니다.
그때는 마냥 행복했었어요.
그토록 보고싶은 아빠를 만났으니 말이죠.
매일매일 2000원씩 주며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하고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인가?지역아동센터 라는곳을 다녔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운영하셨었는데 그곳에서 방과 후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했습니다.
교회도 다녔었어요 4년정도? 물론 기도할때 장난치고 목사님 말씀들을때 지루해하고 했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목사님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쯤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이네요 초등학교5학년때 세계적으로 또 한번 금융위기가 들이닥친 적이있습니다.
이때 아빠는 일자리를 잃고 타고다니던 자동차(그땐 몰랐었지만 다마스였어요 첫차는 티코였었고.)도 중고로 팔고 매일주던 2000원도 가끔가다 주고했었습니다.
아빠는 흔히 말하는 노가다 우리나라말로 표현하자면 일용직을 전전했습니다.
금융위기 이후 집안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졸업당시 졸업앨범비를 못내게 되어 앨범이없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이 뒤로 고등학생때까지 간헐적으로 전기세, 수도세, 도시가스, 통신요금 등등 세금들이 점점 미납되고 가끔가다 전기도 끊기고 겨울에는 가스가 안되서 전기장판틀고 이불 겹겹이 깔고 두꺼운거 덮고자고 그랬었습니다.
가스는 불이 안나오니 휴대용버너로 썼고 365일 거의 라면만 먹었습니다.(그래서 제가 지금 키가 170정도네요ㅠㅠ)
지금도 가스렌지는 안써요 그냥 휴대용 버너써요.
이유는 딱히없어요 그냥 가스렌지 들여놓기 귀찮아서? 아니 부탄가스에 익숙해져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고등학교1학년때까지 매년 방학때마다 저와 여동생은 할아버지네에 가있었습니다.
아빠는 돈번다고 타지로 한달동안 가있었구요.
아무튼 저는이제 중학생이 됩니다.
초등학생때 담임쌤들에게 도움 많이 받고그랬는데 중학생때는 모든 담임쌤들이 도와주시고 이름, 얼굴까지 생생히 기억나네요.
중학생때는 좀 더 성숙해진 시기라서 딱히 에피소드는 없지만 중학교 2학년때 제주도로 수학여행 신청서를 한창 받고있을때였습니다.
아빠한테 제주도 수학여행가야한다고 하니 돈이없어서 못내주겠다고 하더라구요.
뭐 그때까지 저는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중학생때부터 제가 지각을 좀 자주했었는데요.
그래서 중2때 담임쌤은 자주 등굣길에 차타고 저희동네 거쳐서 가시기때문에 저를 태워가주시곤 했습니다.
엄청 젊고 이쁘신 선생님이셨던걸로 기억해요. 애들한테 인기 짱
제 꿈이 이때 자동차 디자이너였는데 디자이너 되면 디자인 한 차 선물해드린다는 약속했던 기억이있네요.
지금은 뭐 돈만 많이버는게 꿈입니다.
어느날 담임쌤 차타고 가는데 제주도 수학여행비 안냈다고 하시길래 저는 그냥 "아빠가 돈이없어서 못내준대요" 라고 말했었습니다.
이땐 쪽팔린거 몰랐습니다.
그러자 쌤이 어느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담임쌤이 부르셔서 교무실에가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저에게 수학여행비에 보태쓰라고 돈을 봉투에 넣어 주셨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땐 정말 순진했던게 지금와서 생각하는거지만 그 어떤 할아버지가 보태주신건 아닌거같아요.
뭐 아무튼 처음으로 비행기도 타보고 제주도도 가보고 좋았던 추억이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3학년이 되고 중학교도 이제 졸업할때가 왔었죠.
근데 이때 역시 졸업앨범비 낼돈이 없어서 졸업앨범을 못샀습니다...
담임쌤이 졸업앨범비 내줄테니 졸업앨범 받아가라고 하셨었죠.
근데 저 정말 이때부터 뭔가 굉장히 쪽팔렸습니다.
그래서 졸업식 날에 중3이라는 놈이! 땡땡이 치고 피시방가서 게임했습니다ㅋㅋㅋㅋㅋㅋ
너무 쪽팔려서 어차피 이제 안볼얼굴들이니까 하고 그냥 안갔어요.
그 뒤로도 며칠간 담임쌤이 졸업앨범 가져가라하셨지만 저는 끝끝내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아 이렇게 보니 졸업앨범 저는 하나도없네요...
저는 학창시절 추억이 앨범이 아닌 제 기억속으로만 간직하고있습니다.
반 친구들 이름 아직도 꽤 많이 기억해요 얼굴도.
기억력이 이리좋은데 공부는 왜 못했을까요ㅇㅅㅇ..
글쓰면서 첫사랑했던 여자애 이름이 기억나네요 성미야~!!
너는 아마 나 기억못하겠지??
저는 이제 고등학생이 됩니다.
하필 중3때 게임에빠져서 공부를 등져버리니 내신등급이 좀 낮은 특성화고에 입학했습니다.
아무튼 고1 1학기때까진 공부 열심히 하자 다짐해서 중상위권정도는 했습니다.
그러다가 2학기때가 되고 저는 사춘기가 왔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학교에서 자유분방하고 흔히 좀 논다는 친구들과 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때 질이 안좋던 애들과는 연 끊고 살고있습니다.
생긴거완 달리 친구가 없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놀랍니다ㅋㅋ)
처음 노래방도 가보고 당구장도 가보고 또 술, 담배를 접하기도...크흠..
뭐 이런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랬던건 맞으니까요 뭐..
학교다니면서 일진애들처럼 막 애들 때리고 하는 학교폭력은 하지않았었어요.
집안 사정도 있거니와 중3때부터 발랄하던 놈이 급 소심해졌으니말이죠.
학창시절 싸워본 경험도 서너번 있을정도로 조용하고 묵묵히 생활했습니다.
건드는 애들도 없었죠.
사춘기가 들고 처음으로 가출도 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집이 최고에요..
자 이제 가장 큰일이 났었던 최근4년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이때가 2014년이죠.
(참고로 학교는 생일이 빨라 1년 빨리들어갔었습니다.)
2014년 이때가 사춘기 절정인데 여친도 사겨보고 뭐 암튼 그랬네요.
얼마 오래가지도 못했습니다. 소심한 성격때문에.
헤어지고나서 알게된 누나를 좋아했는데 그누나는 군인남친이 있었어요.
그 해 4월달 당시 제주도로 수학여행 간다고 한창 들떠있을때였는데 이때 학교를 거의 보름 이상을 안나가고있었습니다.
(이때 참 안타까운 사건이 하나있었죠ㅠㅠ)
암튼 집에도 안들어가고 아빠가 너 어디서 뭐하냐 라고 물을때면 버스비 핑계로 친구네서 생활한다고 변명만 했죠.
사실 집에가기싫었어요 한창 놀때인데 돈이없으니 아빠원망만 커져갔죠.
돈에대한것과 아빠에대한 원망은 중3때부터 있었는데 사춘기를 겪으며 그 파동이 가장 컸던거 같습니다.
친구들 영화보러갈때 옷사입을때 저는 그저 묵묵히 있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담임쌤에게 발각되고 붙잡혀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만, 담넘어서 또 친구네로 도피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아빠가 자퇴서 동의했으니 집들어 오라고해서 집에 들어갔네요.
그리고 아빠친구분이 에어컨 설치하는 일을 하시는데 설치보조로 제가 했었습니다.
실제나이론 17살에 그또래에선 해보지 못했을 중노동? 고노동? 급의 에어컨 설치일을 했으니까요.
배관도 말고 벽에 드릴로 구멍도 뚫고 실외기도 옮기고 겁나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일반 가정집 에어컨 할때도 있었지만 빌딩 같은데가서 덕트도 했고 세종시 가서 천장형 에어컨 30평이상찍 되는거 열 몇개씩 설치하고 그랬습니다.
이 일을 거의 반년동안 했고 그 뒤엔 식당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2015년 어느날이였습니다.
어느 날 큰고모가 오셔서 고모네 형 집을 해준다며 아빠에게 방을빼라고 했어요.
사실 저가 살던 집은 아빠의 집이아닌 큰고모 명의로 된 집이였습니다.
고모부랑 고모랑 아빠에게 집살 돈 모을때까지 살라고 빌려준 집이였죠.
하지만 아빠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하루먹고 하루사는데다가 저랑 여동생 버스비며 세금이며 일당 몇만원으로는 감당이 안될 일이였죠.
이때 고모는 엄청 분노하시고 이제 오갈데 없는 식구는 하루하루 지옥같이 살았습니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하던가요.
친척분들이 돈 조금씩 모아온걸로 도와주셔서 현재 반지하 보증금300 월세25만원 방3개 빌라에 살고있습니다.
이때 아빠가 너무 어렵고 그래서 엄마에게 연락을 했었구요.
사실 엄마가 옛날 번호 그대로 남겨놓았다는게 정말 놀라워요 지금도.
언젠간 연락이 오길 바랬었나봐요.
그뒤로 엄마와 10여년만에 재회를 했구요.
처음만날 때는 엄청 어색했지만 외가 친척분들도 만나고 하면서 점차 친해졌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엄마는 다른 아저씨와 동거하고 계시더라구요.
아..이게 드라마같은데서나 보던 경우가 아니던가. 생각이 됬죠.
그 아저씨와 처음 만나고 그때 매우놀란게 엄마가 자식이 있었다는걸 알고도 그 아저씨가 만났다는거에요.
얘기를 나눠보니 실제로도 엄청 좋으신 분이라서 지금은 별 신경안써요 엄마랑 사이도좋구요.
아무튼 극적인 만남도 하고 이때 저는 놀고있을때여서 엄마가 사촌형한테 부탁해서 외삼촌이 운영하시는 금형공장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이니 18살때네요..
금형공장 여기도 매우 힘들었었어요.
쇳가루 날리고 호이스트라는 자석이 있는데 그걸 조작해서 거대한 쇳덩이를 기계에 셋팅하고 스크류 드릴같은것도 도면애 뚫을 구멍 규격에 맞게 바꿔주고 그러는 보조업무 했습니다.
그때 급여를 최고로 많이받은게 180만원이였습니다.
짧게 3개월 정도 하고 그만뒀습니다 그 나이에 너무 벅찬 일이였어요.
그 뒤로 제작년 2016년에는 자동차 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가서 6개월과정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증 공부를 했습니다,
필기는 합격했는데 실기에서 1개문항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아직 자격증은 필기합격해서 기한이2년이라 앞으로4개월 정도는 더 남아있겠지만 그때 떨어지고 나서 작년 2017년 1월에 LED방등 만드는 공장에 생산직으로 가서 거의 1년동안 일했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자재수급이 안되어 2주가까이 쉴때도 있었고 8월쯤 임금체불때문에 회사 관두고 놀때였습니다.
실상 벌은돈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도 않았었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피시방만 갔었는데 드디어 컴퓨터도 사고 이제 좀 먹고살만해진다 싶었는데 그러다 진짜 자살충동이 일어날만한 일이 있었습니다.(그때걸린 우울증+불면증은 아직도 조금 있네요.)
아빠가 어느날부터 명치쪽이 통증이있고 밥먹다가 말고 화장실가서 토하고 밥도 몇숟갈 뜨지못하고 너무 아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때저는 별일 아니겠거니 했는데 갈수록 그게 점점 더하니 아빠가 혼자 보험에 들고 동네병원가서 엑스레이찍고 진단벋고 했는데 위 용종으로 의심되어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길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위암 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쁘고 귀찮으시더라도 건강검진은 꼭 받아야합니다.)
정말 작년여름 많이 울었습니다.
저렇게 아픈데 수술 못하면 어떡하나.병원비는 어떡하나.
아무튼 9월중순 위암2기로 판정되어 한시름 놓았고 아빠는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병원에 몇주간 입원해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임금체불 되었던 그 공장에 사장님이 일 잘한다고 정직원으로 채용해줄테니 다시 와달라 해서 다시가서 시급7000원받으며 일했었습니다.
참고로 이회사에서 또 임금체불이 되어 작년12월 퇴사했습니다.
명절이 다가왔고 작년추석에 할아버지가 300만원인가를 보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주신 300에 제가 일하면서 좀 모았던 돈 합해봐야 겨우 500만원 내외인데 아빠가 퇴원할때쯤이 고비였습니다.
병원비는 총 합계 1300만원정도 나왔었습니다.
보험을 들긴 했지만 최초 가입 후 일정기간이 지나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그 기간이 지나지 않아서 보험금을 받지 못했었죠.
정말 막막했습니다만 나라에서 지원해줘서 300만원대로 병원비가 내려가서 다행히 병원비 내고 퇴원하고 무슨 임상실험인가? 어떤것때문에 병원측에서 아빠 항암치료 공짜로 받게해줘서 2주간격으로 4달정도 다니다 항암치료는 현재 안받고 있습니다.
아빠 몸상태도 많이좋아지고 해서 한시름 덜어놨지만..올해들어 역대급 두자릿수 시급인상이 되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으나 일자리가 너무 없어서 2주 3주하다가 자재공급이 안된다고 짤리고 현재는 백수신세네요.
아빠도 요 근래에 몸이 많이 회복되고 수술 후 항암치료도 받고 할때 덤핑증후군(설사) 증상도 없어지니 일을 다시나가본다고 하긴하는데 요즘 인력사무소가면 열에 아홉은 그냥 집으로 다시 가야한다고 하더라구요.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지만 21살 미필인 놈을 받아주는곳이 별로없기에 상하차 알바라도 지원해볼까 하는데 그마저도 구하기 힘드네요.
알바 왜 안하냐고 하실분들이 계실거같아 미리 적는거지만 일반 음식점이나 편의점 같은곳은 사실상 파트타임이기에 돈도얼마 안되거든요.
여기까지 제가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도 말못했는데 답답한거 익명으로라도 써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가 걱정이네요.
하루하루 뭐먹고사나 막막합니다.
뭐 그래도 새옹지마라는 말이있듯이 언젠간 해뜰날이 오길 바라고있습니다.
신이 진짜 있다면 로또1등이나 당첨되게해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