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와 영희모녀 제2화 첫날밤 신방을 엿보던 계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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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4 05:38 조회 774회 댓글 0건본문
철수와 영희모녀 제2화 첫날밤 신방을 엿보던 계집애
당시 결혼식은 예식장에서도 많이 했지만 우리집은 형수들이 시집올 때 이른바 구식(전통예식)으로 치렀다. 형들이 장가들 때에는 큰아버지가 신부집으로 형님을 데리고 가서 잔치를 하고는 신부를 데려왔다. 그리고는 우리 동네에서 잔치를 벌이고 하객들을 맞이하는 방식의 예식이었다.
밤에는 이른바 첫날밤 행사가 특별 이벤트로 벌어지는데 대체로 끼가 있는 동네 아줌마들이 염치불구하고 달려들어 들여다 보는 대단히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다른 형수들은 생각이 안나는데 내가 고2때 시집온 셋째 형수 첫날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셋째 형수는 키는 크지 않았으나 젖퉁이와 허벅지는 토실토실하여 볼만 하기는 하였다. 처녀의 옷을 벗기는 장면을 훔쳐보는 재미는 무엇에 비길 바가 아닐 것이다.
신부가 신방을 치룰 방안을 엿보는 것인데, 주로 잔치집과 가까운 친척네 아줌마들이 잔칫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구경하였었다.
좀 교양있는 여인네들은 그런짓을 안했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두 세명의 아낙네들은 염치불구하고 달려들어 구경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야동보다 더 엽기적 선정적인 사건으로 그야말로 생포르노였다고 여겨진다. 이걸 보겠다고 달려드는 아낙네들은 틀림없이 끼가 많은년이라 불륜을 저지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냥 정사 장면을 엿보는 기회도 좀처럼 없을터인데 첫날밤 신부가 신방을 차리는걸 엿본다는 것은 매우 짜릿한 일이다. 우선 들여다 본다는 감정을 갖는 것부터가 짜릿한 일인데 몰카보다 더 야릇한 일이었다고 본다. 새색시의 속살을 감상한다는 것부터가 엽기적 발상! 평상시에는 누드 사진도 제대로 구경 못하는 시골 아낙네들이 신부가 발가벗겨지는 과정을 들여다 본다. 신부의 젖가슴과 허벅지까지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신랑이 신부를 올라타는 행위를 들여다 보며 얼마나 꼴리겠는가? 신랑이 신부의 몸을 처음으로 뚫고 들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신의 선물이었다. 또 섹스 경력이 화려한 아줌마는 신부가 처녀막이 뚫리는 순간을 알아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첫경험을 하며 신음하는 신부를 보는 짜릿한 재미를 이 아낙네들은 포기할 수 없었을 것다. 그리고 첫날밤 신방 풍경을 구경한 여인들은 두고두고 자랑거리 소재로 이용해 먹었을 것이다.
신부방은 안방에서 마루를 지나 있는 건너방이었는데. 이 방은 마루쪽에 창호지가 발라져 있는 미닫이문이 있고 아궁이쪽에도 들락거릴 수 있는 쪽문이 있었다. 두군데에서 아줌마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머리를 썼으며 방안에 신랑보고는 빨리 벗기라고 주문하는 아낙네도 있었다. 내 인생에 단한번 나는 가까이서 이 아줌마들이 창호지문을 뚫고 첫날밤을 관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창호지 문에 눈을 대고 몸을 비비 꼬면서 시시덕거리던 아줌마들은 30대도 있었고 40대도 있었다.
내 기억에 당시 엿보던 여인중 먼 조카자매가 있었다. 언니는 얼굴이 곱상이었는데 나보다 여서 일곱살은 더 많았다. 몸매도 좋아 고종사촌누나와 엇비슷해서 허벅지도 탱탱한게 정말 글래머였다. 반면에 소정이라는 동생은 호리호리한게 눈웃음을 샐샐치며 인사성도 바르고 얼굴도 예뻣는데 나보다 세살이 어렸었으니 아마 열세살짜리 계집애였었다. 돌이켜보면 자매가 동시에 같이 문구멍에 달러붙은 것도 이례적이고, 열세살짜리가 달라붙은 것도 이례적이었다. 언니는 '넌 아직 어리니까 보는거 아냐'라고 군밤을 때리면서 밀어내었고, 동생은 군밤을 맞아가면서도 자꾸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쪼끔 들여다 보고는 쫓겨나는 것을 본 생각이 난다.
그년은 신부의 젖가슴을 볼려고 애썻을까? 신랑의 알몸을 보려고 애썼을까? 아니면 첫날밤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졌을까? 그런데 밖으로 쫓겨나는 계집애를 슬며시 잡아끌고 과수원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나에게 목격되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어떤 중년 남자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 남자는 바로 효정이 조카년의 삼촌이 되는 어른인데 나에게는 큰댁형님이 된다.
잠시후 무슨 수작을 벌이는거 같은데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영희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가까이 가기도 어려웠고 미행할 정도로 간이 크지도 못했다. 어둠속에서 멀리서 보았기에 큰댁형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서로 엉켜 있다가 소정이는 떼어놓고 돌아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바삐 소정이 언니 옆으로 가는 것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때는 안방마루에 한 여인이 그리고 아궁이 쪽에 있는 문 앞에 언니가 있었다. 큰댁형님은 소정이 언니 옆으로 가서 수작을 부렸고 나는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영희가 보채는 바람에 영희엄마에게 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이 당시에 벌어졌던 일들을 알지 못하나 후에 소정이 조카와 큰조카에게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형수들은 시집와서 몇년을 같이 살다가 분가하게 되는데 그러면 나는 저녁을 먹은 후 형님집에 가서 얘기하며 놀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 당시 주로 했던 얘기들은 피난갔던 얘기가 많았고 시집오기전 학창시절 얘기도 간혹 있었다. 또 어떤때는 화투도 했는데 그 당시는 민화투를 하였고 지면 팔뚝 맞는 내기를 하였다. 돈들은 없으니 기껏 한다는 것이 팔뚝 때리기인데 요거 어떤때는 짜릿한 재미가 있었다. 형수 팔뚝을 잡아보는 것도 기분좋은 일인데 한대 때릴 때는 더 기분이 좋았다. 팔뚝을 잡고 때릴려는 시늉을 하면 아플까봐 손목을 끌어당기며 안맞을려고 버둥거리는 모습도 재미있을 뿐더러 버둥거리다보면 어쩌다가 치마속도 보이게되니 그땐 대박이라 하겠다. 뽀얀 허벅지를 보는 순간 눈은 번뜩이게 빛났고 무지하게 흥분되곤 했다. 그때 형수들은 20대 후반이었으므로 그야말로 싱싱한 여인들이었다. 형수들도 시집온 이후로는 실상 외간남자들과 접촉을 잘 못하였던 관계로 시동생과 손목을 잡고 시시덕거릴때 짜릿한 맛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영계 시동생이니 입장을 바꾸어 말하면 영계 처제 손목을 잡고 팔뚝을 때리는 기분과 엇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형수와 시동생이 화투놀이 하면서 팔뚝을 때릴 때는 스트레스도 풀고 에로틱한 느낌도 받았다고 본다.
농사일을 전담으로 하시던 내 바로 윗형은 나보다 8살이 위였다. 나이는 꽤 되었으면서 장가는 아직 안 간 때였는데 어쩌다 쉬는 날이면 동네 계집애들을 과수원 원두막에 불러들이고 장난을 치고는 하였다. 나보고는 멀리서 망을 보게하고는 계집애들을 갖고 노는 것이었다. 대체로 원두막은 널판지로 엮어진 사방이 탁 트인 높은 전망대 형태가 주류였으나 우리집 원두막은 온돌식으로 되어 있었으며 사방이 배나무로 가려있어 밖에서는 원두막이 있는지도 모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안이 따듯하고 이부자리까지 있어서 밤에 잠을 자면서 배나무 밭을 지킬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동네계집애들은 가을에 배를 얻어먹을 욕심으로 형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서비스를 하였다고 추측되어진다. 내가 본 기억은 아랫도리만 벗기고 사타구니를 벌려보기만 하였지 어떤 성행위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