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터미널의 그녀 (1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4 06:24 조회 902회 댓글 0건본문
나는 주머니 속에 고이 모셔둔 반지케이스를 만지작 거리며 걸었다.
추운 겨울바람이 양 볼을 사정없이 때려대며 매서운 추위를 알렸지만
나는 옷깃도 여미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걷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되게 바보같다...당연히...오빠는 이제 정리해야겠지 바보팅아.")
(".......나중에, 나중에 다 얘기해줄게...미안해..오늘은 만나지말자.")
예전에 모텔방에서 그녀와 사귈때 그녀가 했던 말과 오늘 전화기 너머로 들렸던 그녀의 수척한 말투가 머릿속을 차례대로 교차했다.
지금 내 여자친구는 과거의 섹스프렌드와 함께 호텔 스위트룸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황. 게다가 오늘은 서로 약속했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한손엔 크리스마스 케잌과 샴페인병..그리고 한손엔 주머니속에 반지케이스를 확인하는 나..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어디서 부터 바로잡아야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택시가 종각 근처에 다다를 즈음에 나는 답답한 마음에 억지로 택시에서 내려 인도를 걸으며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걷는 내내 오늘 그녀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치밀어 오르는 한편, 그녀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마음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망설이며 무작정 길거리를 걸었다.
네온사인과 인파속에 뒤섞여, 겨울 한가운데를 걷고 있노라니
그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태영아..")
이틀전까지만 해도 살을 섞으며 내 품으로 달려들던 여자였다.
("사랑해..")
불과 몇일 전까지 이불한장을 나눠 덮으며 나체로 서로의 몸을 꼬집으며 알콩달콩한 연애를 했던 사이였다.
[태영아 오늘은 보지말자, 다음에 다 얘기해줄게.]
그녀로 부터 뒤늦게 도착한 문자한통..가슴이 무너져 내릴정도로 아팠다.
길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그녀와 보냈던 우리의 연애가 거짓이 될 수는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결국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
.
12시간만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허탈한 마음에 주저앉아 케잌과 샴페인을 던져놓고 아무렇게나 누워버렸다.
[-기다릴게.-]
푹신한 침대쿠션에 몸을 묻은채 한참을 생각하다 기다리겠다는 짦은 문자 한마디를 그녀에게 전송했다. 그 말외에는 달리 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불꺼진 방안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하던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앞으로 해야할 행동들을 정리했다. 정말 길게도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는 도무지 긍정적인 전망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놈과 그녀를 상대로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망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가 있는 장소와 - 시기와 - 지금 이 상황이 나로 하여금 가장 안좋은 시나리오만을 그리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둘이 있는곳으로 쳐들어갔어야 했을까?--
내겐 도무지 그럴 용기가 없었다.
--지금 쯤 내가 좋아하는 그여자는 그 새끼한테 무슨짓을 당하고 있을까?--
두 사람이 있는 그곳에 찾아갔을 때, 두 사람이 살이라도 섞고 있는 걸 목격한다면
--아마도 그녀도 그놈과 한참 즐기고 있는거 아닐까?--
추악한 상상들이 마음속을 채워간다.
--겁쟁이 새끼, 좋아하는 여자가 딴놈이랑 뒹구는꼴이 무섭지?--
좋아하는 만큼, 그런 모습을 보게된다면 나는 망가질지도 모른다.
--아마 `늘 하던대로` 그녀도 제 짝을 찾아 간거야. 있어야 할 곳으로--
"으아아아아악!!!!!!"
마음의 어둠에 짖눌려버린 나는 한심하게도 불꺼진 방안에서 겁쟁이가 되어
절규할 뿐이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배겟잎에 묻으며..
`따르르르릉`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꺼진 방안에 전화음이 울리며 휴대폰 불빛이 방안을 희미하게 비춘다.
"혜진아!!"
서둘러 전화를 찾아 받는 나. 그러나 액정화면에는 그녀가 아닌
`이승재`
그놈의 이름이 찍혀있었다.
"............."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동안 무음이 이어졌다. 끊긴건가 싶었던 찰나 수화기 너머로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추측컨대 그놈은 전화를 걸어온 채 자신이 있는곳의 소리를 내게 전달해주려는 것 같았다.
(이 새끼 대체 무슨 꿍꿍이인거야..)
입안이 매말라온다. 아까 생각했던 온갖 상상들이 리마인드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꿀꺽.."
저 수화기 너머에서 그 둘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는걸까.
수화기에 귀기울인 채 집중하고 있을때 이윽고 그녀-혜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알았죠?"
"진심이야?"
그놈-이승재의 목소리는 굉장히 가라앉은 듯했다. 두 사람은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건지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교차했다.
"응...진심이예요."
"혜진아...너 정말..."
"이제 끝이예요..이걸로."
`끝`이라는 말에 나는 멈칫하며 몸이 굳었다.
"나는 인정 못해...아니 안해."
조용하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놈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수화기 너머로 소리지르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마음이 치밀어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전화기 너머로 둘의 대화를 엿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번으로 끝내요. 나 이제 오빠말대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야 염혜진. 너 정말 나한테 이러는거아니다.."
"오빠..."
"하하....몇년이나 나 좋다고 따라다니더니, 이제 내가 좋다니까 다른놈이 생겼다고? 너랑 내가 알고 지낸지 몇년인지 알어?? 근 10년이야 알어?."
"오빠..말했잖아요..."
"그래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거지. 내가 널 갖고 놀았으니까. 너한테 심한짓만 해대다가 연애하겠다니까 갑자기 붙잡는 내가 병신이지."
"오빠...진짜..."
"야 어쩌라는거야! 나도 몰랐다고! 내가 느끼는게 떡정인지 사랑인지 몰랐다고!! 근데 니가 없으니까 나도 미치겠다고!!"
"오빠가!!......오빠가 그런것 처럼 나도 그렇다고요!!"
"뭐..?"
"오빠가 그 감정을 깨닫고 매달리는것 처럼 나도 걔가 좋다고요. 나도 걔한테 매달리고 싶다고요."
울먹거리며 필사적으로 말하는 나의 그녀.
"왜 이제 깨달았는데요? 나 갖고 놀땐 아무렇지 않았잖아요? 내가 싫다고 해도, 아프다고 해도!! 늘 억지로 갖고 놀았잖아요!!"
"하......나만 좋았던거야? 너도 즐겼잖아!!"
"아뇨?! 오빠를 사랑한다고 믿었어요...그래서 오빠가 아무리 심한짓을 해도 사랑하니까 다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참았어요. 내심 싫고 아프고 그만하고 싶어도...말을...못...했단....흐흑"
그녀의 울음 섞인 절규는 결국 흐느낌으로 끝을 맺었다.
"내가 잘못했어. 혜진아. 내가 받아줄게, 내,내가...내가 반성할게."
"흐흑...."
"내가 변할게, 이런건지 몰랐어 누구를 좋아한다는게 이런건지 몰랐다.."
"오빠는...흑....아니예요.."
"그놈이랑은 끝내주라...다시 나한테 와줘.."
"싫어...요...흐흑.."
그놈- 이승재는 평생을 무미건조하게 살아왔다. 스스로 타인을 사랑해본적도, 받았던 사랑을 돌려준적도 없다. 그런 그놈에게 혜진이가 찾아왔다.
시간이 쌓일수록 혜진이의 해바라기 사랑은 계속되었고, 어른이 된 혜진이와 몸을 섞으며 그놈의 시각도 달라졌다.
그리고 혜진이가 나를 만나면서 그놈은.
"알았다......알았으니까 그럼 아까 약속대로...오늘 하루만...하루만이라도.."
"........."
뒤늦게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하루만이라도 다시 내 여자가 되어줘...그럼 다 잊어줄게.."
그녀를 향한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이기적인 소유욕.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일그러져 있는 -그 감정은 어린아이가 느끼는 그것과 같았다.
"....................씻고 올게요."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눈물을 닦으려는 듯 했다.
"안돼!!!!!!!! 혜진아!! 안돼!!"
나도 그에 맞추어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못한 듯 했고, 이윽고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찾아왔다.
"야!!! 이승재 개새꺄!!"
"들었지?"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말투. 그놈이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야이 나쁜새.."
"미안한데, 그렇게 됐어. 나도 말좀하자 임마. 나오는대로 지껄여댈거면 그냥 끊어버린다."
그놈의 협박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끼야..."
"그래, 혜진이를 어떻게 꼬셨는지 모르겠지만, 쟤 원래 내여자야. 너도 알지? 내가 쟤한테 평소에 무슨짓을 했는지 말야. "
".........씨발놈아"
"어이쿠, 멋대로 지껄이면 끊는다고 했지?. 마지막 경고다."
"........."
"내가 요 몇주동안 매일같이 전화해도 안받고, 문자도씹고, 교회도 안나오고. 혜진이가 내 생활에 없으니까 엄청나게 허전하더라. 못견디겠는거야. 그래서 알았지. 쟤가 없으면 안된다는걸"
"그건 일방적인 소유욕이야. 사랑도 뭣도 아니야"
그건 이를 갈면서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채 대답했다
"나도 이런기분은 처음이거든? 참나...믿을 수가 없지..꼬맹이적부터 만났던 애한테 사랑이라니..."
"그런 꼬맹이를 덮쳐서 온갖 심한짓을 한게 누군데?"
"그래...그건 내 실수야...내 여자로 이제부터 정말 소중하게 대할려고했어. 근데 들었지?.나보다 니가 더 좋다잖아..하하...이런 거지같은 상황하고는 참.."
"....아까 말한 오늘 한번은 무슨얘기야 이새꺄"
"아 그거? 혜진이랑 딜을 했거든. 오늘 하룻밤만 예전처럼 내여자가 돼준다면"
"여기서 놓아주겠다고?"
"오 감이좋네..맞어. 그러니까 오늘은 나한테 양보해 임마."
"짐승같은 새끼"
"애초부터 내여자였어 임마. 근데 너 나이도 어린놈이 형한테 말이 거칠다?"
"..지금 갈테니 거기 있어라."
"푸하핫, 너 지금 우리가 그 호텔에 있다고 생각하냐?"
"뭐?"
"그 호텔에서는 죽어도 둘이 같이 못있겠다고 하길래 데리고 나왔어. 여긴 다른데야 임마."
-그녀가 예약한 호텔방이 아니라고?
"........어디냐 거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너같으면 알려주겠니? 암튼 오늘밤은 나한테 양보해 임마."
-저 악마같은 놈의 꿍꿍이가 뭔지
"대답해라...어디냐."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온다.
"...근데 궁금하네?"
"이 새끼..."
"니가 무슨 지랄을 하던 난 오늘 혜진이를 안을꺼야, 그리고 내일이 되도 얘 마음이 변함없으면 놓아줘야겠지만...넌 어떻게 할까?"
"뭐?"
"오늘 나는 얘랑 진짜 찐하게 보낼거거든?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정말 진하게 보낼꺼라고..근데 니가 그걸 알고도 평소같이 혜진이를 안을 수 있을까?."
녀석의 비아냥 섞인 진심에 가슴속이 타오르는듯 했다.
"그래..이게 니 본심이겠지...이렇게 상황을 만들어놓고 내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 하는거...그걸 알고 싶어서 이러는거지? 악마같은 새끼.."
"암튼 그런걸로 알아둬, 크리스마스 이브에 커플한테 못할 짓을 한거 같은데 나도 억울하거든? 나도 순정인지 몸정인지 온갖 정든 여자를 너한테 뺏긴거 같단 말이다"
"잠깐 기다려!!"
"혜진이는, 오늘만큼은, 내 여자야."
그렇게 뭐라고 항변할 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당연히 전화해봐도 그놈은 받지 않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였다.
시간은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였다.
"아아아아악!!!!!!!!"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머리를 쥐어 싸매고 바닥에 엎드려 절규할 뿐이었다, 통화 내내 쥐고 있었던 그녀를 위해 준비한 반지케이스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져버리고,
"으아아아아!!!!!!!"
그렇게 망가져 흐느껴 절규할 뿐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정말 가는겨?"
예전 룸메이트였던 상식이 녀석이 내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야 남자라면 누구나 다 가..너도 곧 가고 임마."
나는 애써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친구의 배웅에 화답한다.
이제 입소까지 정해진 시간은 약 십분 남짓.
사회의 마지막 공기를 마신다는 느낌으로 크게 호흡한뒤 각오를 다진 나는 신교대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간다!! 2년뒤에 복학해서보자!! "
"그려! 잘가고! 따라갈께!!"
크게 손을 저어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해주는 고마운 녀석.
녀석이 없었다면 이 몇달 간 나는 폐인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후우....."
폭풍같이 지나간 지난 반년. 그리고 계절이 지나 다시 봄.
모든걸 두고 떠나려니 자연스럽게 지난 몇달을 회상하게 된다.
크리스마스의 악몽.
그 이후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연락을 모두 피했다.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어떤 얼굴로 그녀를 봐야할지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면 무슨말을 할지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해가 넘어가도 그녀의 문자 연락은 꾸준했다.
[-태영아, 제발-]
[-얘기좀해...-]
[-오늘 , 집으로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더라. 이사한거야? -]
[-태영아, 기다릴께...연락 좀 해주라...-]
그런 문자들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모두 피해버린 나.
아직 어리고 철이 없던 나는 그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치고만 있었다.
"차라리 군대를 가 새꺄..."
그런 나에게 상식이 녀석이 던지듯 제안한 수단은 군대였다.
나는 결국 자원입대라는 수단으로 도피해버렸다.
그녀의 연락이 주춤해지던 2월 어느 날. 자원입대를 결심하고 병무청 홈페이지에 신청했던 것이 계기였다. 그리고 첨단문물의 혜택에 힘입어 나는 광속으로 2개월 후 입대영장을 받게 되었다.
[-아무말도 못해서 미안해.-]
[-아무것도 묻지 못해서 미안해-]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서 미안해-]
[-그리고 행복했고, 고마웠어. 안녕-]
마지막으로 수천번 고민한 끝에 그녀에게 네줄로 된 편지를 보낸 뒤
털어내지 못한 미련을 가지고 나는 입대했다.
그날 이후 줄곧 생각해왔다.
그날 임시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준비했던 달콤한 밤을 보내고, 보다 깊은 관계로 발전했을까?
그날 그녀가 그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날 내가 그녀말을 듣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그녀는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없는 공간에서 남은 그녀는 어떻게 살게 될까?
답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지금으로썬 알 길이 없다.
"안녕..혜진아."
그렇게 나는 그 짧고 강렬했던 인연의 이름을 속삭이다가 이내 애써 지우려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