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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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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3 00:25 조회 61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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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아내의 환영에서 벗어났다.

지난 4년6개월여동안 마치 오랜 꿈을 꾼 것 처럼,난 긴 악몽에서 벗어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주위에서 여러 번 중매도 해주시고,소개도 해주셨는데 집에 돌아와서 아내의 사진을 보며

"아란아,오빠 새출발 해도 될까?"

액자속의 내가 한때 사랑했던 여자.

난,아내를 얻기 위해 장모님과의 약속을 지켰다.

남녀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스킨 쉽 한 번 없이 난 3년을 기다렸다.

혼인 전,성관계를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던..........,

3년을 교제해 오면서 유독 여성 편력이 강한 내겐 눈 앞의 아내를 생각하며 성적욕구를 참기 힘들었다.

입사 때 자기소개서와 희망 급여 결정을 하는 사장님과의 면담에서 난,내 능력 것 요구 하겠다고 하여

93년도 초봉37 만원,3개월 후 55만원,6개월 후 90만원,1년 후 서점이 법인으로 전환 되면서

130만원을 받았고,불과 1년만에 서점의 얼굴인 내근 총무직과 함께 결제와 거래처 관리,입출고 관리까지

맡게 되었다.

근무 직원 28명 가운데 남직원이 18명,여직원 10명 중 전직 은행원이 3명,회계사무소 2명,

그리고 주부로 구성된 전국 매출 7순위의 들어있는 잡지왕국.

난, 수당을 받기 위해 다른 동료보다 2 시간 먼저 출근하고 ,4시간 늦게 퇴근 하면서 새벽 6시에 출발하여

소매 서점가를 순회하며 전 날 팔린 책의 재고 파악을 하고,퇴근 후엔 대형 매장을 돌며 매장 관리자들과

여직원들에게 애로사항을 듣기도하며 또 특별히 필요한 서적들을 다음 날 문열기가 바쁘게 가장 먼저 공급한다.

이로써 기본급 130만원과 수당60 만원을 받는다.

또한 출판사 영업자로 부터 상품권들을 종종 받을라치면 사장님께 보고 하고 직원들에게 나눠줘 버린다.

이로 인하여 주월동 과학고등학교 근처의 주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출,퇴근 하는낭비 되는

시간때문에 그동안 직장생활 하면서 모아둔 작은 돈으로 방 세개,마당도 넓고 큰 1층 독채를 얻었다.

가족들과 주위에선 한사코 말린다.

혼자 살면서 뭐하러 이렇게 큰 집을 얻느냐고,하지만 여러가지 쓸 용도가 있었기에........

그리곤,인켈 오디오,삼성 손빨래 대형 세탁기,42인치 대형 TV(VTR),502리터 대형냉장고,피아노등

마치 신혼살림을 준비하듯이 넉넉치 않는 처갓집 형편때문에 아내와 결혼하게 되면 부담주지 않고 싶어서..

그래도 시간 시간 틈틈히 맹인선교회,장애인복지관등 내 평생의 기도제목인 장애인 복지타운을 설립키 위해

엄습해 오는 피곤을 뒤로 한 체,울 장애인들과의 코드는 늘 개방시켜 놓았다.

아내가 떠나고 없는 지금,피아노는 보육원에 드리고,오디오는 맹인재활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 기숙사에 드렸다.

거의 생활의 4/3을 바깥에서 활동하는 내겐 그다지 필요한 것도 아니다.

피아노를 치고 싶으면 교회나 지인들의 피아노 학원에가면 얼마든지 칠 수 있으니까

매주 마다 찾아오시는 장모님,막내 사위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인지 오시면 늘 눈물만 흘리시고,

조그마한 보따리속에서 뭔가를 풀어놓으신다.

오이며 풋 고추며 깻잎등. 왠만한 반찬은 내손으로 할 수 있기에 밑반찬은 가져 오시진 않는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늘상 올라오시는 장모님때문에 재혼은 엄두 조차 낼 수 없었다.

아내 위로 세 살 터울인 얼굴이나 성격이 똑같은 처형이 있다.

올 해 서른 일곱의 미망인이다.

여섯 살 난 사내아이와 초등학교 1학년인 여자 아이가 있는데,

아이들이 낯을 가리는데 명절 날 처갓집에 가면 늘 내 주위에서 떠나지 않는다.

장모님은 내게 늘 입 버릇처럼 말씀하신다.

"문서방,이젠 자네도 다 잊고 재혼 하게나""하신다.

기억속의 아내를 지우려고 하면 문득 문득 찾아오시는 장모님.주야를 구별하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때문에

이사간 집엔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다.

전화국에 동서가 근무하고 있어 어떻게 전화번호는 알아내는지.

1년전,장모님께서 다녀가시면서 툭 던진 말씀.

"서로 마음 아는 사람끼리 "자네,우리 은수 애미(처형)와 지낼란가" ?하셨다.

순간 난 무슨 의미인지 몰라,아직 집주인이 집세를 빼주지 않네요"하였더니

우선 시골 논을 파시겠다고 그러시면서 "어차피 자네가 사준 논인데....."

전처와난, 제일이 바빠서 차일 피일 미루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혼인신고만 하며 살았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직도 아내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난,장모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요?"

"어머님,이젠 저희 집에 오시지 마세요"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난,아내가 여자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고도 아이에 대한 얘기를 처음 부터 숨긴 장모님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용서했다.

날 만나기 전에 여고 시절 "자궁근종" 수술을 받다가 의료 사고를 당하였노라고 "혼인 신고"를 마친 후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셨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까이하는 내겐,정말 앞이 캄캄한 난관이었다.

가족들에겐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8년을 지내왔다.

뭐 아내의 잘못도 아닌데....

아낸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이 내 앞에서 오랜 시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하지만 난,아내와 8년 동안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아이문제를 꺼내 본 적이 없다.

"괜찮아,오빤 너만 있으면 돼. 아인 나중에 입양할 수도 있고...눈물만 흘리는 아내.

친척들이 명절에 오셔서 아이문제를 놓고 말씀하시면, 난 부엌에서 아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고모 처갓집이 원래 애가 좀 늦게 들어선다네요" 큰 처형도 결혼 후 9 년만에 첫 아이를 출산 했어요"하며

또 눈물 흘릴 아내 때문에 늘 가족들이 모이면 미리 당부하곤 한다.

3개월전,어머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전까지 아내랑 함께 8년을 안집과 옷가게 점포가 딸린집에서 살았는데...

갑자게 불어난 경제적인 상황때문에 그 보증금으로 "봉사단체" 사무실을 얻었고 어머님의 사고로 인하여 때문에

부득히 턱이 낮은 1층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난,말바우 시장에서 속옷 좌판을 1년 넘게 했다.

그 때 내게 속옷을 공급해주던 여자 사장님께서 "삼촌은 잘 할 것 같아서 내가 고정 거래처를 소개시켜 줄께"

하며 권유했던 거래처가 대인동과 호남동의 집창촌(사창가)이였다.

역시 장사는 내 성향에 맞는 것 같았다.그리곤 "의류수선"을 시작했다.

아내와 내가 공통으로 할 수 있었던 기술이 난,미싱.재단을 할 수가 있고,아내도 미싱은 잘 탄다.

짬짬히 커텐이며 교회 용품 수납 그리고,손뜨게,리들포인트,스킬자수,컴퓨터자수,십자수 등 난,

이런 기술도 아닌 기술을 가지고 있다.

중학교 때 부터 오로지 한 길만 생각하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배워두었다.

재활원 보호작업장 사회적응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전자제품 조립이나

장애인종합복지관을 이용하는 여성장애인들에게 가르쳐 줄려고...

사창가의 이모(포주)들이 날 잘 봐주신 덕분에 난, 이젠 장사가 아닌 사업가로

불과2년만에 30 명의 직원을 둔 의류 제조 및 대형 유통업체로 급부상 했다.

또한 미싱사들의 고충과 열악한 근무조건을 개선하여 개인사업체로선 전국에서 가장 먼저 직원들을 위해

"4대 사회보험 당연적용사업장"으로 또한 주 5일 근무제를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2003년 3월 부터 실시 하였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사업장이 확대되어,전국의 3종 유흥업소(광주 닭전머리나 황금동 주변/성남 중동 시장 뒷편)에 고정적으로 거래처가 늘어났고, 월 매출 5억대를 넘나들며 법인으로 전환 시기에 있을 무렵,

난, 4년 6개월전교통사고를 당하였다.

그리곤,사업장을 운영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휠체어를 타고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전국의 거래처를

정리해갔다.

밀려 있는 미수금만 해도 약 3억 정돈 된 것 같다.뺑소니 무면허,음주운전 정말 더럽게 걸렸다.

40 일 동안 깨어 나지 않아 죽거나 살아도 식물인간이 된다는 주치의의 말에 아내와 어머님께선

그자리에서 실신 하셨다.

하지만,난 4년 6개월전 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제 전대병원에서 치과(구광내과)만 수술 받으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가슴속에 묻어버린 아낸,다시는 회복 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는지 아님 주위에서 바람을 넣었는지

통장을 가지고 은신해버렸다.

많지도 않은 돈이고 어차피 처갓집 논 한방구 더 사드릴려고 수술을 미루고 여유로 나눈 돈인데.

마지막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아내가 보이지 않아 몇 번이고 어머님과 누님께 여쭤봤다.

수술비 수납으로 고심하고 있던 가족들,3년 8개월 동안 병원진료비와 수술비만 1억 3천을 넘어섰다.

이젠 뭐 돈 들어 갈 일도 없지만.......,그래도 어디서나 살아가는 모습이나 훈훈한 정은 있는 법.

주위에서 날 아는 사람들은 내게 인복은 타고 났다고 한다.

자신들의 삶을 뻔히 알고 있는데, 웃음과 몸 팔아서 모은 돈 2,000만원. 내겐 20억 과도 같은 소중한 돈

이상이다.

난,저들에게 평생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소위 뭇 사람들에게 받는 온갖 멸시와 천대 받는 그 직업 여성들이 수술비 하라며 모아준 2,000만원의 큰 돈.

경기도 성남 중동시장 뒷편의 3 종 업소들.

강진,완도,남창,나주,목포,익산,대구,성남 등 광주에서 일할 때 거래했던

아가씨들이 사업장으로 주문 전화 했다가 직원들의 설명으로 알게 되고,생각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서울에서 샷수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큰처남이 거래처와의 대금 문제로 소송에 휘말리고,

급기야 사업장에 압류가 가해졌다며 전화로 돈 이야기를 하신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오늘 청소년 가장 가정에 다녀 온 후,클럽 회원들과 독거노인 가정 두 집에 도배를 하려고 막 나가려는 참이었는데,

장모님과 함께 안집으로 오셨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회원들만 보내고서........,

난,정말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 했을 때, 사업장 문제로 바쁘다며 단 한 차례도 오지 않았던 손 윗 처남이........,

난 서운치 않으나 아내인 자신의 막내 여동생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 쯤은 고개를 내밀어야 하지 않는가.

도대체 이미 남이 되어버린 내게 오죽 다급했으면 찾아 왔겠는가 생각하면서도 난,아내를 얻기위해 3년을

장모님과의 약속을 지켰고,그 3년의 의미가 아내의 여자로서의 기능상실 사실을 숨기기 위함 인 줄 안 후에도

그리고,말 없이 자신의 삶 찾아간다는 아내를 무작정 4년을 넘게 더 기다렸는데,이젠 무엇을 위해서 처갓집

사정을 들어줘야 하는가.

도대체 이들은 날 누구라 생각하고 있기에.........

그래,다른 건 다 떠나서 그래도 한 때 정말 힘들게 사랑했던 아내의 가족이기에 내 자신 또 이해해야 하는지..,

"아란아 !오빤 널 이해 할 수 있어.뭐 잘한 것 있다고 널 용서 하니 마니 하겠냐 ?.

오빠도 다시 누굴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이 쓸모 없는 나약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디에 쓰시려 하셨는지..이젠 거의 제 기능을 회복해가고 있다.

여잔 남자 하기 나름이라던데, 좀더 잘해 줄 걸..

"아란아"내 가슴속에 묻어버린 너로 인하여 오빤 지난 4년 6개월 동안

여자........결혼에 대한 마음 문이 닫혀 있었잖아 ?

"하지만 오빤,오빠에게 놓여져 있는 지금의 삶이라도 있기에 힘들지 않아.

그때...내가 조금만 회복이 되었어도 너랑 알콩 달콩 정감있는 애기나누며 죽음의 어두운 그늘이 눈 앞에

도래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을 함께 보듬고 정말 다시 태어나도 봉사자로서의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었는걸......"

"기왕 이렇게 된 것 잘 살아라.오빠도 널 위해 늘 기도하마.

살아 가면서오빠가 꼭 한 번은 널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연 이틀 3곳의 봉사지에서 온몸을 뙤약 볕에 맡겼다...그래도 하나도 피곤치 않다...

오히려 내게 주어진 삶이 있기에 차라리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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