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였다가 흙수저 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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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3 19:23 조회 699회 댓글 0건본문
안녕 한동안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써봐.
난 이런글을 씀으로서 힘든 너희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됬으면 좋겠어서 쓰는거니까.
여기에보면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격은 사람들도 많이보고 정말 나는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구나
라고 느낄정도로 이 험한세상 어떻게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딱한생각도 많이 들어.
일단 내가 미국에 현재 살고있는 20대 중반 남자야. 어릴때와서 한국 문법이나 그런걸 잘 못하니 이해바랄께.
내가 너희들한테 해주고싶은 말은 내가 지금껏 살면서 격어온 과정과 현재 내 모습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고싶어, 좋은 동기부여가 되길바랄께.
나는 유치원때부터 초등학교 때 까지 정말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어, 아버지 께서는 건축회사 오너 이셨구
내와 내 동생이 태어나고 정말 승승장구 하셔서 정말 정말 좋은 신축 빌라에서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 입학후에
70평+ 신축아파트 (당시 방 4개) 로 이사를 갔어. 그당시 아버지는 일이 알아서 정말 잘 돌아갔구 나와 시간도 많이
보내주셨지. 여담이지만 그당시때 아버지가 어디 건물을 지여주면서 그 의뢰인이 돈을 갚지 못해서 국X대학교 앞에
적당한 크기에 호프집을 대신 돈으로 위임받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시 재미삼아 운영했던걸로 기억해.
아버지는 워낙에 검소 하시고 돈천원짜리 한장 허투로 쓰시는 분이 아니셨기때문에 나는 그 초등학교 어린시절 아버지한테
돈천원 한장 받아보지 못했지만 (아무댓가 없이 돈주는건 정서상 안좋은거라고) 집안 자체가 워낙에 부유하다보니
무언가가 필요한게 있으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바로 사다 주셨었어. 초등학교때는 어머니가 전 학교 선생님 금강산 으로
다 여행을 보내줄정도였고, 선생님들은 날 정말 끔찍이 아끼셨어. 물론 학교내에서도 학우들과 싸움한번 없이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정말 잘보냈어.
불행하게도 탄탄대로만 걷던 우리집에가도 정말 큰 위기가 왔어. 어느날 갑자기 집안이 폭삭 망해버렸다.
그 이유는 엄마라는사람이 돈을 가지고 장난질을 했더라.. 바람을 피우거나, 도박, 술, 마약, 유흥 이런게 아니라
외갓집에 연관되어있는 어떤사람에게 그 돈을 다 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 그당시에 적게는 3천만원~
많게는 1~2억까지 빚을 내놨더라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이런 소식이 들렸었어.
그때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 3학년 1 학기 끝날 무렵이었어.
어느날 갑자기 빚쟁이들이 우리집에 들이 닥치기 시작했고 엄마 어딨냐면서 엄청난 전화가 집에 오기도 했어..
난그때 전화 트라우마가 생겨서 거의 15~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화기는 항상 진동이야..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놀래서..
어느날 아침에 학교에가고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오더니 나한테 "너네엄마 어딨니" 라고 물어보더라고 ㅋㅋ 그래서
모르겠어요 했거든 (진짜몰랐다 어디가있었는지). 그러니까 이제 막 10 살 먹은애한테 하는말이
"니네 엄마한테 전해, 가만 안있겠다고" 라고 말하고 우리집으로 가더라고..
암튼 여차여차해서 그당시에 살던 신축아파트는 아주 헐값에 빚쟁이한테 넘기고
우리는 외갓집 엄마 동생인 이모집으로 잠시 이사를 하게되었어.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 정말 너무 작은 집이었거든.. 정말 구라 안보태고 당시 부모님 안방에 내 방 더한거만하더라 집이..
이모네도 거실방이 있었고 거기서 이모랑 이모부가 생활을했고, 나와 동생, 엄마아빠는 이모네 안방에서 이불깔고 자기도했지..
친할머니도 계셨는데 우리 고모댁에 가계셨었어. 아무튼 이래저래 해서 급하게 갚을빚은 다 갚았구..
우리 식구들한테 아직 진빚은 다 못갚았지만, 사채랑 은행빚은 갚고 우린 고모집 근방인 인천으로 오게됫어.
여기서 4학년~6학년 1학기까지 끝내구 미국으로 오게되.
여기서 한가지 너희가 알아야 할점은 엄마라는 사람이 돈을 아직까지도 어디에다가 얼마를 주고, 왜 주었는지 이유는 아직까지 모른다..
아버지가 손찌검 까지 해가고 욕을하고 집어 던지고 때려부셔도 말을 안하더라..
아버지는 그래서 아직 본인이 나이가 젊고 (당시 42세) 아직 이악물면 일어설수 있을꺼라 생각하셨고, 또 자식둘이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엄마가 있고 없고 영향을 많이 받을꺼라 생각을 하셔서, 이혼을 안하시고 엄마라는사람에게 약속과 각서를 받고
다시 제 2의 인생을 꿈꾸면서 미국으로 왔어. 근데 돈도 없고, 인맥도 없고 이런 머나먼 타지땅에서 할께 뭐가 있겠냐?
해외물 먹거나 해외에 좀 관심있는애들은 다 알겠지만.. 남에집 가게 밑에 들어가서 막노동식으로 일을하셨어..
하루에 12시간 밥먹는시간외엔 앉지도 못하고, 빈민가 흑인 애들한테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일을하셨어.. 그렇게
12시간 일해서 받아오신돈은 하루에 80달러 조금 넘었던거같아. 주에 6일 나가시면서 벌어오신돈이 500달러였구..
그당시때 우리가 살던집 한달 월세만 900달러였던걸로 기억한다..
몇년은 정말 잠잠했어, 엄마라는 사람도 일을 잡아서 일을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여기서 정말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립해서 밥은 굶지 않고 먹을정도로 는 살고있었지. 하지만 시발좆같은 내인생에 이런일이 또 찾아올거라고
생각을 전혀 못했다.. 엄마라는 인간이 또 일을 저질르더라..
위에 썼던것처럼 똑같은 레파토리였고 금액은 얼마 인지도 모를정도로..
그래서 그당시때 타던 자동차도 할부금을 못내서 뺏긴적도 있고.. 아파트 월세도 3-4달 밀려서 못내서
고소장 날라온적도 두번이었어.. 당시에 영어를 할줄 아는사람이 나밖에 없었기때문에 나는 부모님손에 끌려서
이곳저곳가서 부모를 대변해서 손과발이 닳도록 비는게 내 직업이었다.. 정말 스트레스는 극도로 받았고.. 한국나이로 15살때부터
온갖 빚쟁이 전화란 전화는 내가 다 받았고, 자동차가 넘어갔었을땐 아직 다 못낸 할부금 조금이라도 받을라고 시발새끼들이
수업중에도 하루에 10번씩은 전화를 더 하더라고..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 집에가면 아파트 관리실에서 고소장 뽑아다가
우리집 문앞에다가 붙여놓은적도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고 웃음거리 된적도 있고.. 진짜 지금 생각하면 치가 떨릴정도다..
내가 살던 미국은 니네들이 생각하는 뉴욕이나 LA 가 아닌 좀 시골동네여서 저런 대도시처럼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할수가 없어,
무조건 자가용을 타고 옮겨다녀야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운전은 못했다만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중학교때는 만날수도 없었어,
부모님은 일하느라 저녁늦게나 되야 집에오셨거든.
어찌됬던 여차여차해서 이렇게 중학교를 마무리를 짓고 고등학교로 올라갔어. 미국은 고등학교때부터 모든 성적이 대학가는데
반영이 되기때문에 정말 많이 부담감을 가지고 갔다.
하지만 상황만 바뀌었지 현실은 바뀌지 않더라.. 하루가 머다하고 싸우는 부모님이랑, 하루가 머다하고 전화오는 빚쟁이.. 엄마라는인간은
또 정신 못차리고 어디서 돈 빌려와서 신형 인피니티 뽑고.. 그거 차 뺏기고 몇개월 잠잠하다가 또 어디서 돈 구해와서 신형 렉서스 타고
ㅋㅋㅋㅋㅋ 나랑 동생은 제대로된 옷한벌 없어서, 학교에서 행사나 파티있을땐 정말 매번 죽고싶었다..
아버지는 공부도 잘하셨고 나름 깨어있는 분이셨지만 난 왜 이혼을 안했는지는 지금까지 이해가 안간다.. 만약에 일찍이 일을 정리
하셨더라면 이정도까지 힘들진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만 들더라고.. 암튼 자꾸 이렇게 빚만 쌓여가고 하니까 집안을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더더욱이 더 깊은 수렁으로만 빠져 들게 되더라고 ㅋㅋ..
공부에 대한 의욕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방과후 스포츠 활동에도 점점 의욕이 떨어지고..
하지만 내 인생에 터닝 포인트는 내가 고등학교 9학년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9학년이 고딩시작이고 12학년 까지 4년이야)
말아먹고 10 학년때부터 진짜 시작이되었어. 9학년때는 이래저래 방황도 하고 힘들던 시절이었어..
아마 그때 내 전교 석차가 9학년 500 명중 470등인가 했을꺼야 ㅋㅋ
그냥 공부 지지리도 안하고 학교 끝나고 미식축구팀들어가서 미식축구만 했거든..
그런데 우리아버지는 나에게 대한 희망을 절대 놓지 않으셨고 눈물을 호소 하면서 공부를 다시 하라고 하시더라..
사실 나는 머리가 나쁜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체격도 183에 당시 90이었어.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지만 내가 맞은 미식축구 포지션은 덩치가 좀 있어야되서
ㅎㅎ.. 암튼. 그렇게 공부를 하라고 하시더라고.. 대학은 가야하니까.. 그래야 내가 우리집안을 일으킬수 있을테니까..
그때부터 인거같다.. 정말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책잠깐 보고 학교가서 수업시작전에 체육관들어가서 운동좀 하다가 학교 수업듣고,
끝나면 미식축고하고, 끝나면 도서관가서 공부하고 이렇게 매일매일을 아침 5시부터 밤 12시 까지 하루도 안빼먹고 했어.
정말 힘들었지만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 부모님은 엄청 치고 박고 싸우고 깨지고 부러지고.. 난 빚쟁이한테
계속 전화오고 그랬었지.. 그렇게 10학년 1학기를 마치니까 중간고사후에 전교 랭캥이 80위 까지 올라갔어.. 정말 너무 놀랬지..
몸도 더 근육질로 변해가서 균형도 더 잘맞아보이구.. 정말 집안만 생각하면 좆같았지만 난 이런 거에 행복을 느끼면서 이악물고
살아갔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흘려 10 학년을 끝냈고 그때 랭킹은 50위 안에 있었었어.
그리고 이제 대망의 11학년이 오게됬지. 이때는 SAT라고 해서 미국 수능을 볼수있거든. 여기서부턴 계속 비슷한 패턴이니까 그냥 빨리빨리
넘어가도록할께.
11학년 1 학기 때 전교석차 12등까지 올라갔다, 이제는 공부하는 노하우와 재미가 들리다보니 정말 성적받아오는게 무섭더라고
그만큼 힘들고 고된시간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선 정말 많은걸 깨닳게 해주는 시기였던거같아.. 노력하면 할수는 있겠구나 라고
어두운 내 인생에 한줄기 빛같은 시기였으니까. 그러고 SAT를 보게됬어.
간략하게 SAT를 소개하자면 3가지 서브젝트 시험이야. 1 - 수학, 2 - 영어, 3 - 독해 이거든
각 서브젝트마다 800점이 만점이야. 난여기서 2180점 아주 괜찮은 점수를 받게되었어. 2200점이 넘었으면 아이비리그 한번
도전해봐? 하겟지만은 내 머리가 거기까진 안되더라구. 암튼 그렇게 해서 미국 미시건 앤아버 라는 좋은 학교에 입학통지서를 받게되고
이래저래 해서 고등학교를 잘 마무리 하게되. 난 여기서 이제 모든게 새로워지고 앞으로 나가는 일만 남을줄 알았다. 물론 이때까지는
집안사정은 개밑바닥이었고 우리아버지는 너가 학교 다녀오면 많은게 바뀌어있을꺼라고.. 무거운 마음으로 가지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라고 다독여주셨지. 근데 말야, 세상은 매정하게도 여기서 또 나에게 시련을 주더라...
문제는 영주권이야, 나는 당시 영주권이 없었고 소셜시큐리티 번호라 해서 한국에 주민등록번호 같은건데 난 아직 이게 없었어..
영주권 신청중이긴했는데 아직 번호를 받기전 단계라서 받지를 못했어 ㅎㅎ.. 그래서 미국은 학비가 비싸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갈계획이었는데 여기서 또 막히게 되었지.. 번호가 없기 때문에 대출자체가 불가능했어...
그래도 미국이 한국 보단 나은게, 내가 학교에 사정을 말하니까 일단 학교로 오라하고 내 현재 미국에서의 신분 서류를 모두
제출하니까 학교 자체내에서 일단 외상으로 보내주더라 .. 물론 돈은 다 갚아야하지..
이래저래해서 이제 시간이 몇달 지나서 난 짐 가방을 싸매고 공항으로 갔다.. 우리집에서 미시건까지는 비행기 타고 3 시간 정도였어.
공항에서 아버지가 용돈하라고 준 돈 300달러.. 또 한손에는 아빠가 그당시 일하던 가게 주인한테 사정해서 빌려온돈 3만달러짜리 수표..
이걸로 일단 기숙사비랑 학비 조금은 보태서 내라고.. 진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미어지는데 내가 눈물을 흘리면
아버지는 어쩌겠냐 해서 뒤도 안돌아보고 비행기에 몸을 싫었어. 그러고 학교로 왔다.
학교에 사정을 말해서 기숙사 배정받고 3만달러를 학교측에 내밀었어. 그러고 2일뒤에 첫수업이 시작되.. 당시 내가 계산했을때
빚이 학비만 5만5천 달려.. 기숙사 1년 1만 1천 달러.. 교제비 한학기에 1500달러.. 내 용돈과 차비 식비 등등 합해서
일년에 7만달러 정도 나왓었어 ㅋㅋㅋ 시발이게 말이되냐.. 암튼 그랬는데 난 3만불 수표를 지불했으니 그래도 4만달러구나 했는데
며칠있다가 학교측에서 전화가 오더라 ㅋㅋ 너가 준 수표 입금 시켰는데 은행에 돈이없다고 ㅋㅋㅋㅋ 그래서 놀라서 집에 전화했더니
엄마라는 인간이 아빠가 3만달러 빌려온거 귀신같이 알고 그돈 찾아가지고 빚갚았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차피 학교에선 내 상황을 알고 외상식으로 해준다 했던거니까 크게 상관은 안했는데 난 병신으로 찍혔었을꺼야.. 아직도 기억난다 그 눈빛들..
대학에와선 공부 진짜 열심히 했다, 모든 성적 다 A 였고 전공과목 교수와도 정말 친하게 지내서 도움도 이래저래 많이 받았어.
그렇게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찾아왔어. 내 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장학금도 받고 했다 매 학기마다.
그런데 사람이란게 빚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더라.. 2학년 끝났는데 내 빚이 15만 달러 가까이 됬었어.
말이 15만 달러지 한화로 바꾸면 1억 6천 가까이 되는 돈이야.
난 두려워서 휴학했어. 장학금신청대회랑 이런거 정말 미친듯이 응모해서 돈받고, 또 성적 우수생 장학금을 내고 하니까 돈이 반정도 줄더라고..
그러고 2학년 끝나니까 기다리던 영주권도 나오고해서 융자내서 학교 돈 먼저주고 지금은 매달 갚고 있어.
일단 휴학을 하고나서 나는 독립 결심하게되. 집에만 있으니까 자꾸 기가 빨리는거같고 하루 좋은일이 없으니까.. 이꼬라지 볼바에는
그냥나가겠다 해서 독립선언을 아버지께 하게 되는데 당연히 안된다 하셨지 ㅋㅋㅋ..
근데 내 뜻은 확고했다. 일단 일을 닥치는 대로해서 돈을좀 모았어.. 그러고 여행을 다녀오기로 맘을 먹었어.
그동안 고생했다는 내 자신에게 주는선물? 같은 개념으로.. 해외나 그런곳은 못가고 미국 서부여행을 하기로했어 한달동안.
그렇게 난 여행을갔고, LA, 샌프란시스코, 샌디에고, 라스베가스 등등 안가본곳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나에게 선물이 주어진건지.. 라스베가스에서 정말 예쁜 여인을 만나게되었어. 한국에서 여행차 온 정말 예쁜 처자였어.
바로 이끌려서 그녀와 내 남은 여행을 함께 하게되고 꼭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각자 해어졌다.
그러고 난 집에와서 이제 몰래몰래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어.
동생한테는 미리 말해두었고. 라스베가스에서 만난 그 어여쁜 여인과는 자연스럽게 롱디로 사귀게 되었고
내가 이사가는 날짜에 맞춰서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오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난 3월달에 집에서 나와서 뉴욕 근방으로 이사를 왔어. 아버지께 쪽지
하나 둔체로. 물론 난리가 났지 ㅋㅋㅋㅋㅋ
미리 알아본 원룸을 계약을 했고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있었고,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 올라오기전
두달정도는 일주일에 2~3번 정도 뉴욕 맨하탄에 면접 보러다니면서 직장은 운좋게 내가 원하던 직종으로 잡히게 되었어.
몇달뒤 자연스럽게 여자친구는 미국으로 오게되었고. 처음엔 소소하게 살림 꾸려서 원룸에서 빠듯하게 시작을했다.
나도 그당시엔 월급이 소득세 32% 제외하고 2천 달러였어. 빡빡하지만 행복했고, 무엇보다 삶에 족쇄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생활을 하고 내가 원하는직장에서 원하는일을 하는게 너무 행복했어. 나는 짬이 안됬었기 때문에 8시 까지
출근을 해야하는대 한시간 미리 일찍가서 세팅다 해놓고 잡일 있을만한거는 내가 미리 다했다. 한국계 회사도 아닌데
뭐하러 이렇게 하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정말 나는 배우고 싶었고, 이걸로 나는 꼭 무언가를 해야한다 느꼇으며, 이렇게
열심히 해야 이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을했었어. 그렇게 매일 아침 새벽 5시 30 분에 기상해서
씻고 버스타고 맨하탄으로 출발했다. 처음엔 좀 이상한 눈치였고, 저러다 말겠지 라는 눈으로 보더니 점점 인식이 바뀌더라고.
그렇게 1년 이라는 시간을 보냈따.
내 부서는 아주 작고 방금 생긴 부서라 내가 들어갈당시 부장님 빼고 밑에 사원은 나랑 한날 같이 들어온 4명이 전부였어.
1년후에 부장이 사장과 크게 싸우고 퇴사했어. 그리고 내 부서에는 이 부서를 이끌어 갈만한 인재가 필요했고.
평상시 성실했던 나를 지목하셨고 난 그렇게 1년만에 부장이라는 완장을 차게되. 이때 내 나이 만으로 23살때야.
연봉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어. 물론 더 올라갈수있었겠지만 아직 나이와 경력을 가만해서 좀 많이 깍였더라고.
그래도 내가 그전에 벌던 돈에 3배를 벌게 되었어, 이 모든게 이 회사에 입사한지 1년만에 이루어낸 성과야.
지금은 연봉 10만달러 번다, 이제는 여자친구도 간간히 벌이를 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살림은 여유가 넘치고
내 동생과 아버지한테만 조금씩 용돈을 보내고 있어. 동생은 미군입대를 한후에 학비 면재를 받겠다고 하고 지금 열심히 운동과 입대
준비중이고, 아버지는 이제 따로나오셔서 마지막 기회를 한번더 엿보고 계셔.
나는 예쁘고 정말 똑똑한 여자친구를 만나게되서 그전보다 더 정신차리고 살려고 노력해. 작고 귀여운 강아지도 대려와서 키우고,
필요했는데 부담스러웠던 자동차도 하나 뽑았고.. 아직까지는 원룸인데 2달내로 새로 분양 시작한 아파트로 이사가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해. 여름이 오기전엔 이제 결혼도 일찍 할 생각이라 돈도 따로 모으고 있고.
저저번달에는 미국에서 온라인 쇼핑몰도 하나 오픈해서 이제 좀더 욕심을 내볼려고도 하고있어. 정말 짦은 시간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고 내가 한글로만 글을 쓰면 이렇게 문맥이 이상하고 글을 잘 못쓰는데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는 게이들 있다면 정말
고마워.
너희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절대 포기하지마 게이들아, 내가 위에 쓴글들은 너무 내용이 많아 질꺼같아서 정말 줄이고 줄이고
저거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지만 일부러 안쓴부분도 많아, 정말 난 힘든 시기를 보냈어. 그래도 포기하지않고 내가 하고싶은걸 찾아서
노력하고 미친듯이 밀어붙이니까 이렇게 되더라. 게이들아, 부모 잘만나서 부유하거나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란 애들도 있겠지만
나보다 더 힘든 환경에서 자라거나 자라고 있는 게이들도 있을꺼라 생각이든다.
예비아재새끼가 지껄인다 생각하지말고 정말 동네 친한형이 조언해주는거라 생각하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사회는 만만치 않고 정말 더러운새끼들이 많아.
치이고 치여서 지치겠지.. 다시말하지만 정말 포기하지말고, 여러가지 해야할 일들이 많으면 그중에서
지금 가장 먼저 해야할꺼같은 일을 먼저해라, 그 외에 나머지 것들은 10에 9은 중요하지 않거나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일들이야.
네 몸과 정신이 가장 먼저 해야할꺼같다 하는거를 먼저하고, 정말 성실하게 해라. 사람이 밑바닥을 쳐보니까 위로 기어 올라가는일도
있구나 라는걸 난 이제 느낀다. 나쁜생각하지말고 너의 인생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꺼같다 하는것들은 옆으로 쳐내고 앞으로 나아가라.
너가 살아야 너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돌볼수있어.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휘청하는 일이 없도록 바랄께.
모두들 건강하고 열심히들 살아라.
세줄요약
1. 금수전대 망해서 미국으로 도망치듯옴
2. 미국에서도 일어날려하면 엄마라는인간이 겐세이 검
3. 좆같아도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결국엔 일어서고있슴.
난 이런글을 씀으로서 힘든 너희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됬으면 좋겠어서 쓰는거니까.
여기에보면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격은 사람들도 많이보고 정말 나는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구나
라고 느낄정도로 이 험한세상 어떻게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딱한생각도 많이 들어.
일단 내가 미국에 현재 살고있는 20대 중반 남자야. 어릴때와서 한국 문법이나 그런걸 잘 못하니 이해바랄께.
내가 너희들한테 해주고싶은 말은 내가 지금껏 살면서 격어온 과정과 현재 내 모습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고싶어, 좋은 동기부여가 되길바랄께.
나는 유치원때부터 초등학교 때 까지 정말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어, 아버지 께서는 건축회사 오너 이셨구
내와 내 동생이 태어나고 정말 승승장구 하셔서 정말 정말 좋은 신축 빌라에서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 입학후에
70평+ 신축아파트 (당시 방 4개) 로 이사를 갔어. 그당시 아버지는 일이 알아서 정말 잘 돌아갔구 나와 시간도 많이
보내주셨지. 여담이지만 그당시때 아버지가 어디 건물을 지여주면서 그 의뢰인이 돈을 갚지 못해서 국X대학교 앞에
적당한 크기에 호프집을 대신 돈으로 위임받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시 재미삼아 운영했던걸로 기억해.
아버지는 워낙에 검소 하시고 돈천원짜리 한장 허투로 쓰시는 분이 아니셨기때문에 나는 그 초등학교 어린시절 아버지한테
돈천원 한장 받아보지 못했지만 (아무댓가 없이 돈주는건 정서상 안좋은거라고) 집안 자체가 워낙에 부유하다보니
무언가가 필요한게 있으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바로 사다 주셨었어. 초등학교때는 어머니가 전 학교 선생님 금강산 으로
다 여행을 보내줄정도였고, 선생님들은 날 정말 끔찍이 아끼셨어. 물론 학교내에서도 학우들과 싸움한번 없이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정말 잘보냈어.
불행하게도 탄탄대로만 걷던 우리집에가도 정말 큰 위기가 왔어. 어느날 갑자기 집안이 폭삭 망해버렸다.
그 이유는 엄마라는사람이 돈을 가지고 장난질을 했더라.. 바람을 피우거나, 도박, 술, 마약, 유흥 이런게 아니라
외갓집에 연관되어있는 어떤사람에게 그 돈을 다 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 그당시에 적게는 3천만원~
많게는 1~2억까지 빚을 내놨더라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이런 소식이 들렸었어.
그때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 3학년 1 학기 끝날 무렵이었어.
어느날 갑자기 빚쟁이들이 우리집에 들이 닥치기 시작했고 엄마 어딨냐면서 엄청난 전화가 집에 오기도 했어..
난그때 전화 트라우마가 생겨서 거의 15~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화기는 항상 진동이야..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놀래서..
어느날 아침에 학교에가고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오더니 나한테 "너네엄마 어딨니" 라고 물어보더라고 ㅋㅋ 그래서
모르겠어요 했거든 (진짜몰랐다 어디가있었는지). 그러니까 이제 막 10 살 먹은애한테 하는말이
"니네 엄마한테 전해, 가만 안있겠다고" 라고 말하고 우리집으로 가더라고..
암튼 여차여차해서 그당시에 살던 신축아파트는 아주 헐값에 빚쟁이한테 넘기고
우리는 외갓집 엄마 동생인 이모집으로 잠시 이사를 하게되었어.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 정말 너무 작은 집이었거든.. 정말 구라 안보태고 당시 부모님 안방에 내 방 더한거만하더라 집이..
이모네도 거실방이 있었고 거기서 이모랑 이모부가 생활을했고, 나와 동생, 엄마아빠는 이모네 안방에서 이불깔고 자기도했지..
친할머니도 계셨는데 우리 고모댁에 가계셨었어. 아무튼 이래저래 해서 급하게 갚을빚은 다 갚았구..
우리 식구들한테 아직 진빚은 다 못갚았지만, 사채랑 은행빚은 갚고 우린 고모집 근방인 인천으로 오게됫어.
여기서 4학년~6학년 1학기까지 끝내구 미국으로 오게되.
여기서 한가지 너희가 알아야 할점은 엄마라는 사람이 돈을 아직까지도 어디에다가 얼마를 주고, 왜 주었는지 이유는 아직까지 모른다..
아버지가 손찌검 까지 해가고 욕을하고 집어 던지고 때려부셔도 말을 안하더라..
아버지는 그래서 아직 본인이 나이가 젊고 (당시 42세) 아직 이악물면 일어설수 있을꺼라 생각하셨고, 또 자식둘이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엄마가 있고 없고 영향을 많이 받을꺼라 생각을 하셔서, 이혼을 안하시고 엄마라는사람에게 약속과 각서를 받고
다시 제 2의 인생을 꿈꾸면서 미국으로 왔어. 근데 돈도 없고, 인맥도 없고 이런 머나먼 타지땅에서 할께 뭐가 있겠냐?
해외물 먹거나 해외에 좀 관심있는애들은 다 알겠지만.. 남에집 가게 밑에 들어가서 막노동식으로 일을하셨어..
하루에 12시간 밥먹는시간외엔 앉지도 못하고, 빈민가 흑인 애들한테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일을하셨어.. 그렇게
12시간 일해서 받아오신돈은 하루에 80달러 조금 넘었던거같아. 주에 6일 나가시면서 벌어오신돈이 500달러였구..
그당시때 우리가 살던집 한달 월세만 900달러였던걸로 기억한다..
몇년은 정말 잠잠했어, 엄마라는 사람도 일을 잡아서 일을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여기서 정말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립해서 밥은 굶지 않고 먹을정도로 는 살고있었지. 하지만 시발좆같은 내인생에 이런일이 또 찾아올거라고
생각을 전혀 못했다.. 엄마라는 인간이 또 일을 저질르더라..
위에 썼던것처럼 똑같은 레파토리였고 금액은 얼마 인지도 모를정도로..
그래서 그당시때 타던 자동차도 할부금을 못내서 뺏긴적도 있고.. 아파트 월세도 3-4달 밀려서 못내서
고소장 날라온적도 두번이었어.. 당시에 영어를 할줄 아는사람이 나밖에 없었기때문에 나는 부모님손에 끌려서
이곳저곳가서 부모를 대변해서 손과발이 닳도록 비는게 내 직업이었다.. 정말 스트레스는 극도로 받았고.. 한국나이로 15살때부터
온갖 빚쟁이 전화란 전화는 내가 다 받았고, 자동차가 넘어갔었을땐 아직 다 못낸 할부금 조금이라도 받을라고 시발새끼들이
수업중에도 하루에 10번씩은 전화를 더 하더라고..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 집에가면 아파트 관리실에서 고소장 뽑아다가
우리집 문앞에다가 붙여놓은적도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고 웃음거리 된적도 있고.. 진짜 지금 생각하면 치가 떨릴정도다..
내가 살던 미국은 니네들이 생각하는 뉴욕이나 LA 가 아닌 좀 시골동네여서 저런 대도시처럼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할수가 없어,
무조건 자가용을 타고 옮겨다녀야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운전은 못했다만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중학교때는 만날수도 없었어,
부모님은 일하느라 저녁늦게나 되야 집에오셨거든.
어찌됬던 여차여차해서 이렇게 중학교를 마무리를 짓고 고등학교로 올라갔어. 미국은 고등학교때부터 모든 성적이 대학가는데
반영이 되기때문에 정말 많이 부담감을 가지고 갔다.
하지만 상황만 바뀌었지 현실은 바뀌지 않더라.. 하루가 머다하고 싸우는 부모님이랑, 하루가 머다하고 전화오는 빚쟁이.. 엄마라는인간은
또 정신 못차리고 어디서 돈 빌려와서 신형 인피니티 뽑고.. 그거 차 뺏기고 몇개월 잠잠하다가 또 어디서 돈 구해와서 신형 렉서스 타고
ㅋㅋㅋㅋㅋ 나랑 동생은 제대로된 옷한벌 없어서, 학교에서 행사나 파티있을땐 정말 매번 죽고싶었다..
아버지는 공부도 잘하셨고 나름 깨어있는 분이셨지만 난 왜 이혼을 안했는지는 지금까지 이해가 안간다.. 만약에 일찍이 일을 정리
하셨더라면 이정도까지 힘들진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만 들더라고.. 암튼 자꾸 이렇게 빚만 쌓여가고 하니까 집안을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더더욱이 더 깊은 수렁으로만 빠져 들게 되더라고 ㅋㅋ..
공부에 대한 의욕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방과후 스포츠 활동에도 점점 의욕이 떨어지고..
하지만 내 인생에 터닝 포인트는 내가 고등학교 9학년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9학년이 고딩시작이고 12학년 까지 4년이야)
말아먹고 10 학년때부터 진짜 시작이되었어. 9학년때는 이래저래 방황도 하고 힘들던 시절이었어..
아마 그때 내 전교 석차가 9학년 500 명중 470등인가 했을꺼야 ㅋㅋ
그냥 공부 지지리도 안하고 학교 끝나고 미식축구팀들어가서 미식축구만 했거든..
그런데 우리아버지는 나에게 대한 희망을 절대 놓지 않으셨고 눈물을 호소 하면서 공부를 다시 하라고 하시더라..
사실 나는 머리가 나쁜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체격도 183에 당시 90이었어.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지만 내가 맞은 미식축구 포지션은 덩치가 좀 있어야되서
ㅎㅎ.. 암튼. 그렇게 공부를 하라고 하시더라고.. 대학은 가야하니까.. 그래야 내가 우리집안을 일으킬수 있을테니까..
그때부터 인거같다.. 정말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책잠깐 보고 학교가서 수업시작전에 체육관들어가서 운동좀 하다가 학교 수업듣고,
끝나면 미식축고하고, 끝나면 도서관가서 공부하고 이렇게 매일매일을 아침 5시부터 밤 12시 까지 하루도 안빼먹고 했어.
정말 힘들었지만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 부모님은 엄청 치고 박고 싸우고 깨지고 부러지고.. 난 빚쟁이한테
계속 전화오고 그랬었지.. 그렇게 10학년 1학기를 마치니까 중간고사후에 전교 랭캥이 80위 까지 올라갔어.. 정말 너무 놀랬지..
몸도 더 근육질로 변해가서 균형도 더 잘맞아보이구.. 정말 집안만 생각하면 좆같았지만 난 이런 거에 행복을 느끼면서 이악물고
살아갔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흘려 10 학년을 끝냈고 그때 랭킹은 50위 안에 있었었어.
그리고 이제 대망의 11학년이 오게됬지. 이때는 SAT라고 해서 미국 수능을 볼수있거든. 여기서부턴 계속 비슷한 패턴이니까 그냥 빨리빨리
넘어가도록할께.
11학년 1 학기 때 전교석차 12등까지 올라갔다, 이제는 공부하는 노하우와 재미가 들리다보니 정말 성적받아오는게 무섭더라고
그만큼 힘들고 고된시간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선 정말 많은걸 깨닳게 해주는 시기였던거같아.. 노력하면 할수는 있겠구나 라고
어두운 내 인생에 한줄기 빛같은 시기였으니까. 그러고 SAT를 보게됬어.
간략하게 SAT를 소개하자면 3가지 서브젝트 시험이야. 1 - 수학, 2 - 영어, 3 - 독해 이거든
각 서브젝트마다 800점이 만점이야. 난여기서 2180점 아주 괜찮은 점수를 받게되었어. 2200점이 넘었으면 아이비리그 한번
도전해봐? 하겟지만은 내 머리가 거기까진 안되더라구. 암튼 그렇게 해서 미국 미시건 앤아버 라는 좋은 학교에 입학통지서를 받게되고
이래저래 해서 고등학교를 잘 마무리 하게되. 난 여기서 이제 모든게 새로워지고 앞으로 나가는 일만 남을줄 알았다. 물론 이때까지는
집안사정은 개밑바닥이었고 우리아버지는 너가 학교 다녀오면 많은게 바뀌어있을꺼라고.. 무거운 마음으로 가지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라고 다독여주셨지. 근데 말야, 세상은 매정하게도 여기서 또 나에게 시련을 주더라...
문제는 영주권이야, 나는 당시 영주권이 없었고 소셜시큐리티 번호라 해서 한국에 주민등록번호 같은건데 난 아직 이게 없었어..
영주권 신청중이긴했는데 아직 번호를 받기전 단계라서 받지를 못했어 ㅎㅎ.. 그래서 미국은 학비가 비싸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갈계획이었는데 여기서 또 막히게 되었지.. 번호가 없기 때문에 대출자체가 불가능했어...
그래도 미국이 한국 보단 나은게, 내가 학교에 사정을 말하니까 일단 학교로 오라하고 내 현재 미국에서의 신분 서류를 모두
제출하니까 학교 자체내에서 일단 외상으로 보내주더라 .. 물론 돈은 다 갚아야하지..
이래저래해서 이제 시간이 몇달 지나서 난 짐 가방을 싸매고 공항으로 갔다.. 우리집에서 미시건까지는 비행기 타고 3 시간 정도였어.
공항에서 아버지가 용돈하라고 준 돈 300달러.. 또 한손에는 아빠가 그당시 일하던 가게 주인한테 사정해서 빌려온돈 3만달러짜리 수표..
이걸로 일단 기숙사비랑 학비 조금은 보태서 내라고.. 진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미어지는데 내가 눈물을 흘리면
아버지는 어쩌겠냐 해서 뒤도 안돌아보고 비행기에 몸을 싫었어. 그러고 학교로 왔다.
학교에 사정을 말해서 기숙사 배정받고 3만달러를 학교측에 내밀었어. 그러고 2일뒤에 첫수업이 시작되.. 당시 내가 계산했을때
빚이 학비만 5만5천 달려.. 기숙사 1년 1만 1천 달러.. 교제비 한학기에 1500달러.. 내 용돈과 차비 식비 등등 합해서
일년에 7만달러 정도 나왓었어 ㅋㅋㅋ 시발이게 말이되냐.. 암튼 그랬는데 난 3만불 수표를 지불했으니 그래도 4만달러구나 했는데
며칠있다가 학교측에서 전화가 오더라 ㅋㅋ 너가 준 수표 입금 시켰는데 은행에 돈이없다고 ㅋㅋㅋㅋ 그래서 놀라서 집에 전화했더니
엄마라는 인간이 아빠가 3만달러 빌려온거 귀신같이 알고 그돈 찾아가지고 빚갚았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차피 학교에선 내 상황을 알고 외상식으로 해준다 했던거니까 크게 상관은 안했는데 난 병신으로 찍혔었을꺼야.. 아직도 기억난다 그 눈빛들..
대학에와선 공부 진짜 열심히 했다, 모든 성적 다 A 였고 전공과목 교수와도 정말 친하게 지내서 도움도 이래저래 많이 받았어.
그렇게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찾아왔어. 내 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장학금도 받고 했다 매 학기마다.
그런데 사람이란게 빚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더라.. 2학년 끝났는데 내 빚이 15만 달러 가까이 됬었어.
말이 15만 달러지 한화로 바꾸면 1억 6천 가까이 되는 돈이야.
난 두려워서 휴학했어. 장학금신청대회랑 이런거 정말 미친듯이 응모해서 돈받고, 또 성적 우수생 장학금을 내고 하니까 돈이 반정도 줄더라고..
그러고 2학년 끝나니까 기다리던 영주권도 나오고해서 융자내서 학교 돈 먼저주고 지금은 매달 갚고 있어.
일단 휴학을 하고나서 나는 독립 결심하게되. 집에만 있으니까 자꾸 기가 빨리는거같고 하루 좋은일이 없으니까.. 이꼬라지 볼바에는
그냥나가겠다 해서 독립선언을 아버지께 하게 되는데 당연히 안된다 하셨지 ㅋㅋㅋ..
근데 내 뜻은 확고했다. 일단 일을 닥치는 대로해서 돈을좀 모았어.. 그러고 여행을 다녀오기로 맘을 먹었어.
그동안 고생했다는 내 자신에게 주는선물? 같은 개념으로.. 해외나 그런곳은 못가고 미국 서부여행을 하기로했어 한달동안.
그렇게 난 여행을갔고, LA, 샌프란시스코, 샌디에고, 라스베가스 등등 안가본곳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나에게 선물이 주어진건지.. 라스베가스에서 정말 예쁜 여인을 만나게되었어. 한국에서 여행차 온 정말 예쁜 처자였어.
바로 이끌려서 그녀와 내 남은 여행을 함께 하게되고 꼭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각자 해어졌다.
그러고 난 집에와서 이제 몰래몰래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어.
동생한테는 미리 말해두었고. 라스베가스에서 만난 그 어여쁜 여인과는 자연스럽게 롱디로 사귀게 되었고
내가 이사가는 날짜에 맞춰서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오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난 3월달에 집에서 나와서 뉴욕 근방으로 이사를 왔어. 아버지께 쪽지
하나 둔체로. 물론 난리가 났지 ㅋㅋㅋㅋㅋ
미리 알아본 원룸을 계약을 했고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있었고,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 올라오기전
두달정도는 일주일에 2~3번 정도 뉴욕 맨하탄에 면접 보러다니면서 직장은 운좋게 내가 원하던 직종으로 잡히게 되었어.
몇달뒤 자연스럽게 여자친구는 미국으로 오게되었고. 처음엔 소소하게 살림 꾸려서 원룸에서 빠듯하게 시작을했다.
나도 그당시엔 월급이 소득세 32% 제외하고 2천 달러였어. 빡빡하지만 행복했고, 무엇보다 삶에 족쇄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생활을 하고 내가 원하는직장에서 원하는일을 하는게 너무 행복했어. 나는 짬이 안됬었기 때문에 8시 까지
출근을 해야하는대 한시간 미리 일찍가서 세팅다 해놓고 잡일 있을만한거는 내가 미리 다했다. 한국계 회사도 아닌데
뭐하러 이렇게 하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정말 나는 배우고 싶었고, 이걸로 나는 꼭 무언가를 해야한다 느꼇으며, 이렇게
열심히 해야 이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을했었어. 그렇게 매일 아침 새벽 5시 30 분에 기상해서
씻고 버스타고 맨하탄으로 출발했다. 처음엔 좀 이상한 눈치였고, 저러다 말겠지 라는 눈으로 보더니 점점 인식이 바뀌더라고.
그렇게 1년 이라는 시간을 보냈따.
내 부서는 아주 작고 방금 생긴 부서라 내가 들어갈당시 부장님 빼고 밑에 사원은 나랑 한날 같이 들어온 4명이 전부였어.
1년후에 부장이 사장과 크게 싸우고 퇴사했어. 그리고 내 부서에는 이 부서를 이끌어 갈만한 인재가 필요했고.
평상시 성실했던 나를 지목하셨고 난 그렇게 1년만에 부장이라는 완장을 차게되. 이때 내 나이 만으로 23살때야.
연봉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어. 물론 더 올라갈수있었겠지만 아직 나이와 경력을 가만해서 좀 많이 깍였더라고.
그래도 내가 그전에 벌던 돈에 3배를 벌게 되었어, 이 모든게 이 회사에 입사한지 1년만에 이루어낸 성과야.
지금은 연봉 10만달러 번다, 이제는 여자친구도 간간히 벌이를 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살림은 여유가 넘치고
내 동생과 아버지한테만 조금씩 용돈을 보내고 있어. 동생은 미군입대를 한후에 학비 면재를 받겠다고 하고 지금 열심히 운동과 입대
준비중이고, 아버지는 이제 따로나오셔서 마지막 기회를 한번더 엿보고 계셔.
나는 예쁘고 정말 똑똑한 여자친구를 만나게되서 그전보다 더 정신차리고 살려고 노력해. 작고 귀여운 강아지도 대려와서 키우고,
필요했는데 부담스러웠던 자동차도 하나 뽑았고.. 아직까지는 원룸인데 2달내로 새로 분양 시작한 아파트로 이사가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해. 여름이 오기전엔 이제 결혼도 일찍 할 생각이라 돈도 따로 모으고 있고.
저저번달에는 미국에서 온라인 쇼핑몰도 하나 오픈해서 이제 좀더 욕심을 내볼려고도 하고있어. 정말 짦은 시간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고 내가 한글로만 글을 쓰면 이렇게 문맥이 이상하고 글을 잘 못쓰는데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는 게이들 있다면 정말
고마워.
너희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절대 포기하지마 게이들아, 내가 위에 쓴글들은 너무 내용이 많아 질꺼같아서 정말 줄이고 줄이고
저거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지만 일부러 안쓴부분도 많아, 정말 난 힘든 시기를 보냈어. 그래도 포기하지않고 내가 하고싶은걸 찾아서
노력하고 미친듯이 밀어붙이니까 이렇게 되더라. 게이들아, 부모 잘만나서 부유하거나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란 애들도 있겠지만
나보다 더 힘든 환경에서 자라거나 자라고 있는 게이들도 있을꺼라 생각이든다.
예비아재새끼가 지껄인다 생각하지말고 정말 동네 친한형이 조언해주는거라 생각하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사회는 만만치 않고 정말 더러운새끼들이 많아.
치이고 치여서 지치겠지.. 다시말하지만 정말 포기하지말고, 여러가지 해야할 일들이 많으면 그중에서
지금 가장 먼저 해야할꺼같은 일을 먼저해라, 그 외에 나머지 것들은 10에 9은 중요하지 않거나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일들이야.
네 몸과 정신이 가장 먼저 해야할꺼같다 하는거를 먼저하고, 정말 성실하게 해라. 사람이 밑바닥을 쳐보니까 위로 기어 올라가는일도
있구나 라는걸 난 이제 느낀다. 나쁜생각하지말고 너의 인생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꺼같다 하는것들은 옆으로 쳐내고 앞으로 나아가라.
너가 살아야 너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돌볼수있어.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휘청하는 일이 없도록 바랄께.
모두들 건강하고 열심히들 살아라.
세줄요약
1. 금수전대 망해서 미국으로 도망치듯옴
2. 미국에서도 일어날려하면 엄마라는인간이 겐세이 검
3. 좆같아도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결국엔 일어서고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