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좁다2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3 23:59 조회 425회 댓글 0건본문
은영이는 한참이나 주저앉은 상태로 흐느꼈어. 그리고 난 그저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게 있더라도, 더 이상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왜... 왜.....”
은영이는 한동안 왜라는 말만 되풀이 했어. 충격이 컸을 거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던 그녀
였으니까. 내가 은영이었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반응을 했겠지.
“... 농담이지? 장난이지?”
한참을 울고 난 후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며 은영이가 나에게 물어왔어.
“아니... 이제 그만 하자...”
“왜.... 왜....”
은영이가 이별의 이유를 물어왔는데, 그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었어. 생각해 보면, 난 은영이에게 숨긴 게 참 많았던
것 같아.
“힘들어.”
무미건조한 나의 대답에 은영이는 허탈한 듯, 크게 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어.
“준석씨... 나 사랑하잖아... 나 사랑하니까... 다 이겨낼 수 있다고 했잖아.”
“아니...”
“아니라고 하지 마... 제발....”
“나... 너무 힘들어... 이제.... 지겹고....”
“그런 말 하지 마.... 나 사랑한다고 말해 줘... 응... 우리 사랑하잖아.”
은영이는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껴안았지. 그녀의 울컥한 체온이 느껴졌지만, 더 이상 내 것이 될 수는 없었어. 내가
가져서도 안 될 것이었지. 난 두 손으로 은영이의 팔을 붙잡고 천천히 그녀를 밀어냈어.
“제발... 왜 그래....”
“은영아... 우리 더 이상 이러지 말자.”
“아... 좀.... 왜 그래... 갑자기...”
은영이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밀어내는 나에게 매달리더라. 가슴이 아파왔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어. 은영
이가 그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끝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어.
“귀찮아... 이제 모든 게....”
“내가 귀찮아? 준석씨... 미안해... 내가 앞으로 더 잘할 게....”
은영이는 정말 모든 것을 나에게 걸었던 거야. 이렇게 되면, 은영이에게 숨겨왔던 사실을 밝혀야 할까? 내가 20년 전에
당신이 맡았던 학급의 학생이었다고... 내가 당신의 제자였다고... 밝혀야 할까? 그러면 은영이는 충격을 받아서 나에게
서 떠나게 될까?
“은영아... 나 사실은....”
은영이 딸인 지연이 이야기는 하지 못해도 나와 김은영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 시궁창속의 쥐새끼
처럼 더러운 인간이 되더라도, 끝낼 상황에는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아니... 김은영 선생님... 저...저 원래... 이름은...”
갑작스레 바뀐 내 태도에 은영이는 동그랗게 큰 눈을 뜨며 나를 쳐다봤어. 그래, 이참에 속 시원하게 다 밝혀버리는 거야.
그러면 은영이는 나에게 질려버리겠지. 그리고 자신이 속았다는 배신감에 나를 욕하고 떠날 거야.
“그... 그만...”
“원래... 내 이름은... 한유...”
“알아... 다 아니까... 그만!”
은영이는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어. 그런데 다 알고 있다는 은영이 말... 도대체 무슨 뜻이야? 정말로 나와 20년 전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이야?
“그만... 그만 해.... 제발....”
“.........”
“그냥.... 나만 바라봐 주면... 안 돼.... 안아주면 안 돼?”
은영이는 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더라. 그런데 지연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
았어. 보지 않고 원망하겠다는 건, 살아서만, 꼭 살아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 다시 한 번 약해지려는 마음
을 다잡았어.
“정말... 다 아는... 거야?”
“흑... 그래... 다 알고 있다고.... 다 알아버렸단 말이야...”
“그런데... 왜.....”
“이미... 이미.....”
“.........”
“이미 사랑해버린 걸.... 어떡하냐고!”
은영이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고 한참을 또 울었지. 그리고 눈물이 범벅인 얼굴을 내게 보이며 다시 묻더라.
“과거...가 무슨 상관이야... 서로... 사랑하면.... 된 거잖아.... 제발...”
그래, 어쩌면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은영이 말이 맞겠지. 이미 사랑해버린 걸...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대로 은영이와 함께 할 수는 없잖아. 결국 나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돼. 그 거짓말을 믿든, 안 믿든, 난 보이지
않는 칼로 은영이의 심장을 찔러야 했으니까.
“그거는 솔직하지 못한 내가 미안해... 하지만....”
“........”
“그것 때문에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니야... 나 정말 힘들어... 살아갈 날이 많은 세상이... 두렵고....”
“함께... 하면... 이겨낼... 수 있어.”
“아니... 나 이겨내지 못해.”
“아니야... 자기는... 이겨낼 수 있어...”
“바보야... 그게 아니라고... 나... 여자가 생겼단 말이야. 너 말고... 다른 여자...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여자....
그런 여자가 생겼단 말이야!”
일부러 은영이에게 고함을 질렀어. 내가 여자가 생겼다고 하니까, 은영이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은 듯, 거의 움직
이지도 못했던 것 같아. 이 거짓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긴 했었어. 은영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거든.
“거짓말... 하지... 마.”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거짓말 아니라니까. 은영이 니가 있어서... 내 인생 발목이 잡히는 것 같아... 그만 좀 하자... 이제... 너무나 힘들고...
너무나 지쳤어... 그런데 그 여자는... 이런 나를 위로해 주고... 내 마음을 다독여 줘...”
“거짓....”
“씨발... 진짜라니까. 너 왜 이렇게 날 나쁘게 만드는 거야... 씨발... 진짜... 상처를 받을까 봐... 이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그저 궁금했어... 궁금했다고...”
“........”
“옛날에 내 선생님이었던 여자가... 내 앞에서 보지 벌리는 게... 너무나 신기했어... 그래서 한 번 먹어보고 싶었던
것 뿐 이야... 호기심... 그래 호기심... 그런데.... 이제 너무 지겨워... 꺼졌으면 좋겠는데... 눈치 없이... 내 앞에서...
내 인생을 가로 막고 있냐고!”
“.........”
“좀... 내 눈 앞에서 좀 꺼지라고... 너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되잖아... 나 그리고 다른 여자 있다고...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있단 말이야. 너 같은 걸레년 말고... 정말 나를 사랑해 주는.... 그런 고귀한 여자가 있다고... 왜... 아직도 안
꺼지는 거야!”
나 스스로도 이렇게 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리고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은영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저 내 말을 묵묵히 듣더니,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래... 좀 꺼져라.”
은영이는 옷을 챙겨 입고, 백을 손에 쥔 채, 힘없이 현관문으로 걸어갔어. 난 그녀의 뒤에 무수한 욕설을 내뱉었지. 지금
생각해도 난 참으로 잔인하고 나쁜 인간이었어.
“에이... 씨발!”
현관문이 닫히고, 내 눈에서 은영이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난 욕설을 크게 내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지. 그리고 진짜
밤새 울다시피 울었던 것 같아. 울다가 지쳐서 정신을 잃고, 또 정신이 들면 울기 시작했고...
마치 첫사랑과 헤어졌던 그 옛날처럼 가슴이 아파왔어. 그런데 이번이 조금 더 아프더라. 첫사랑보다 은영이를 더 사랑
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건 아니야. 그저 나이를 먹었음에도 똑같은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게 괴로웠고, 어쩌면 나이를 먹
는다는 것이 꼭 정신적으로 강해지는 건 아니었기에 더 아파했던 것 같기도 해.
그날이... 은영이와 나의 마지막 날이었지...
너무 더럽고도 추잡스러웠으며, 잔인하고도 슬픈 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