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좁다20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3 23:59 조회 513회 댓글 0건본문
“선생님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성적으로 학생들을 차별을 하지도 않았고, 공부만을 강요하지도 않으셨어요.
기억나세요?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좋은 사람을 사귀고,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인생에서 정말 중
요하다고 말씀하셨죠. 주위 친구들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셨죠. 친구들을 소중히 하는 사람은 타인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행위, 그것만 하지 않아도 좋은 인생
을 살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서 전 선생님이 참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기억나시죠?”
머리가 어지러웠어. 지연이와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 지연이가 은영이 딸
이라는 사실을 안 후, 난 충격에 휩싸여 입을 전혀 열지 못했지. 지연이는 옛 이야기를 했어. 지연이 입에서 흘러나
온 이야기들은 과거의 내가 입으로 내뱉었던 말들이었지.
“아직 어리지만, 선생님 말씀을 듣고, 최소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삶은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때로는 내가
조금 손해 보는 일이 생기더라도 묵묵히 참고 견뎌 냈어요. 그러면 더 나은 미래, 더 행복한 내 인생이 찾아올 것
이라 생각했는데...”
지연이는 4년 전, 고1이었고, 그때 내가 담임을 맡았었지.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던 것 같아.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킬 아이는 아니었어. 시쳇말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처럼, 아주 선한 학생이었지.
은영이와 다시 만나기 전에 직장을 옮겼다고 했지? 학교를 옮기게 되었어. 그러니까, 은영이 딸인 지연이가 고3 생활
을 마치고 졸업할 때까지, 내가 그 학교에 근무 했었거든. 그때까지 은영이와 나는 서로 교사라는 사실만 알 뿐, 근무
지는 몰랐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너무 억울해요. 선생님 말씀대로 착하게, 선하게,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왜 전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한 거죠?”
생각해보니까, 한 번은 은영이가 나를 위해서 교복 이벤트를 해줬지. 자신의 딸이 입었던 교복이라고 했는데, 난 왜
이렇게 멍청했던 것일까? 은영이가 입었던 교복은 내가 근무를 했던 학교의 교복이었는데 말이야. 왜 그것을 인식
하지 못했던 것일까? 은영이에게 홀려, 교복 자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저희 어머니를 만나는 남자가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나 충격이었어요.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건, 매일같이 고통 속에 눈물을 흘리는 것 뿐...”
지연이가 고 1때 우리반 학생이었는데, 그렇다면 은영이는 나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학부모들 전부와 연락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 연락처는 알고 있었을 것인데... 그리고 딸의 담임 선생님이라면 이름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을 것
인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까,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하더라.
“선생님... 제가 잘못된 삶을 살았던 걸까요?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왜 선생님은 그러지 못하셨
나요? 왜 그래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건가요?”
분명 은영이는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지. 내가 딸의 담임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와의 만남부터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거든. 나와 연인 관계로 발전
한 것도... 그 과정 속에서 은영이의 언행도... 설명을 하기 힘들어. 납득이 가는 설명 말이야.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 고민 했어요. 혹여나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 걱정도 했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생님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죠. 저는 오로지 선생님이 물러나시기를 바라고 바랬어요.”
은영이는 분명 인식하지 못했을 거야. 머리를 수백 번, 수천 번 굴려 봐도 은영이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나와 만남을
이어가지는 않았을 거야. 나 역시 지연이가 은영이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듯이 말이야. 학부모에 대한 이름과
연락처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김은영이라는 학부모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듯이...
“하지만... 제 생각과 달리 선생님이 너무 완고하셨죠. 선생님도 보셨겠지만... 제 몸이 떨린 거... 분노 때문이에요.
화가 났어요. 너무나 화가 났다고요.”
은영이... 김은영 선생과의 인연은 약 20년 전부터 이어졌지. 그리고 최근 만남으로 연인이 되기 전에도 그녀와
나의 사이에는 예상치 못한 지연이라는 끈이 존재했던 거야. 너무나 꼬아놨어. 꼬아버린 실은 풀어낼 수야 있겠
지만, 엉켜버린 실들은 자를 수 밖 에 없겠지. 인연이라는 것도 연줄이 너무 많으면, 복잡한 관계에 지쳐버리게
마련이지.
“저는 아버지와 오빠가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너무나 고통스럽고... 사랑하는 가족이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해요. 선생님이... 결심만 해주시면... 어머니는 제 자리로 돌아오실...”
수순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바둑이나 장기, 심지어 오목에서도 수순이 틀리면, 승맥에서도
길이 나지가 않아. 지연이라는 여자가 은영이 딸인 것을 폭탄을 던진 후에 알았다면, 충격 속에서도 나의 이기심으
로 끝까지 밀고 나갔을지도 몰라. 아니, 밀고 나갔을 거야. 사람이란 때론 부도덕 앞에서 더욱 더 뻔뻔해지기 마련
이니까.
“부탁이에요.”
은영이와 나는 폭탄을 제조했고, 또 그것을 투척할 시기를 계획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 시기를 미루었지. 연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갑작스런 사건들, 그리고 이유와 핑계들, 어쩌면 은영이와 나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제조한
폭탄은 불발탄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라.
“정말... 부탁 드릴게요.”
불발탄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폭탄을 던지는 것을 주저했고, 그 사이에 은영이와 나, 그리고 지연이에 대한 관계가
밝혀졌어.
“선생님... 선생님이 저에게 가르치셨던 그 말씀대로... 행동해주세요.”
지연이는 흐느끼고 있었지만, 아주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지.
“부탁입니다...”
이미 내 마음은 지연이라는 내 과거의 제자에게 산산이 부서진 상황이었어. 깨진 유리 조각들처럼, 이제는 그리고
다시는 깨지지 않았던 그 날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어.
“선생님...”
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 입이 마음처럼 열리지는 않더라. 남들이야 욕을 수 천 번도 하겠지만, 난 나대로 굉장히
심적 충격을 받고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지연이는 충격적인 말까지 했었지.
“이혼을 하게 되면... 혹시라도 이혼을 하게 되면... 어머니를 보지 않고 원망하겠다는 건... 꼭 살아서... 살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순간 내 심장은 찢겨져 나갔고, 내 머리는 아무런 작동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본능적으로 중얼거리듯 지연이에게
말을 했지.
“미안하다... 조금만... 시간을 줘...”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방바닥에 앉아서 벽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 같네. 휴대폰은 계속 울렸고, 보지
않아도 은영이임을 알 수 있었지. 그렇지만 받지는 않았어.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으니까.
“하... 흑...”
눈물이 나오더라. 이 눈물의 의미가 잘못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인지, 아니면 은영이와의 이별에 대한
괴로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던 것 같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고 난 후에야 조금은
마음이 안정이 되더라.
“차라리... 그날 공원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은영이와 헤어지고 난 후, 그녀와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지 말았어야 했어. 후회스럽더라. 그때만 멈출 수 있었다면,
지연이도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인데... 이대로 은영이와 모든 것을 무시하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
이라는 확신이 들었어.
“.........”
천천히 집을 둘러봤어. 안방, 그리고 거실, 작은방, 부엌... 은영이의 흔적이 많았어. 누가 보더라도 마치 부부가
생활하는 것처럼 은영이의 물건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흔적들도 조만간 지워 나가야겠지.
어느새 밤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난 지연이에게 문자를 하나 남겼어.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을 했고, 그리고 며칠
안에 모든 것을 끝내겠다고 다짐을 했었지. 그 상황 속에서도 내 문자를 받고 지연이는 고맙다라는 짧은 답장을 하더
라. 그래, 내가 미친놈이었던 거야.
다음 날, 하루 종일 은영이 연락을 피했는데, 그녀는 저녁에 장을 봐서 우리 집을 찾아왔지. 나를 보더니, 연락을 왜
받지 않냐고 하면서 오히려 애교 섞인 미소를 보여줬어.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어디 아프냐면서 걱정하는 모습을 보
이던 은영이...
나는 아프지 않다고 했어. 은영이에게 아프지 않다고 했어. 그 말을 하려는 건 아닌데, 가슴에서 은영이에게 해야 할
말이 차마 나오지가 않더라.
“우리... 자기... 몸이 허해졌나... 내가 오늘 저녁 실력 발휘 좀 할 테니까... 저기 앉아서 쉬고 있어. 응?”
은영이가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부엌으로 향하더라. 그리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어. 난 그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은영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 어차피 헤어질 것이라면, 어차피 이별할 것이라면,
지금... 그래 당장... 이 순간 말을 해야 할 텐데...
“자기... 오늘 하루 힘들었나 봐?”
요리 준비를 하면서 은영이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그녀의 목소리는 나름 명랑했던 것 같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나를 위해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는 웃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
이별에 비하면 만남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이별은 그저 말 한 마디면 충분하니까 말이야. 만남은 여러 과정이
필요하고, 그만큼 시간도 걸리는데, 이별은 그저 1초도 걸리지 않는 말 한 마디면 되니까,
그 얼마나 잔인하고 편한지 몰라.
“자기야... 뭐라고?”
은영이는 요리 준비를 하다가 뒤를 돌아서 나를 쳐다봤지. 그녀의 표정은 많이 일그러져 있었어. 예쁜 그녀의 얼굴이...
매우 일그러져 있었지.
“은영아....”
“다시 말해 봐... 잘못 말한 거지?”
“그만....”
“.......잘못 말한 거지?”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 순간 은영이는 바닥에 주저앉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