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좁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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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3 23:57 조회 358회 댓글 0건본문
은영이 딸이라는 말에 순간 머리가 멍 하더라. 머릿속이 온통 까맸던 것 같네. 몇 초간 은영이 딸이 무슨 말을
했는데, 제대로 듣지 못했지. 은영이 딸에게 연락이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었는데 말이야.
나와 은영이 문제가 터지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지만, 일이 이렇게 급작스레 다가오니까 당황스럽고 걱정이 앞서
더라. 더구나 은영이 남편도 아니라, 그녀의 딸이라니. 그녀의 딸이 나에게 만남을 요구했어. 그것도 전화가 왔던
그 순간 말이야.
“아... 네.”
그녀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어. 지금 당장 만나서 대화를 하자고 했고, 자신의 어머니인 은영이에게는 알리지 말라
는 것이었어. 내가 거절하면 일이 커질 수 밖 에 없다고 하더라... 나름 강단 있는 요구였지만, 나이가 어려서인지
앳된 목소리는 지울 수가 없었지. 일단은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내가 은영이의 딸과 만난 장소는 우리 집 근처였어. 집 근처에 있는 2층짜리 유명 카페였는데, 만나는 장소만 놓고
보더라도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크게 숨을 들이 내쉬고 카페 2층으로 올라갔어.
음악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있기도 하고, 수다를 떨고 있기도 했지.
그리고 구석진 창문가에서 혼자 앉아 있던 어린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어. 멀리서 보더라도 낯설지 않은 느낌이 강
했지. 어쩌면 낯설지 않는 게 당연했지. 그 어린 여자는 은영이 딸이었으니까, 매우 닮을 수 밖 에...
2층에 올라왔을 때, 난 그 어린 여자와 눈이 마주쳤어. 은영이 딸도 본능적으로 내가 어머니의 내연남?인 것을 알았
겠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고, 약간의 어색함을 느끼며 인사를 나눴어. 생각보다 그녀는 차분했어. 화를 내지 않
더라... 오히려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나도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어. 알 수 없었다기보다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
어. 표정을 보아하니, 은영이 딸도 마찬가지로 보였지. 나보다 한참이나 어렸기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
했지만...
“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은영이 딸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어왔어. 이미 은영이와 나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결정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질문은 대답이 가능했지만, 문제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은영이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지.
“.... 우리는...”
진짜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 어쩌면 내면에 있던 부끄러움과 염치가 한몫을 했겠지만,
진짜 입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더라.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마음에 두고 있어요.”
“그... 말씀은...”
“함께....살 생각이에요.”
은영이 딸이 내 대답을 듣고 벌벌 몸을 떨더라. 내가 오기 전에 시켰던 아메리카노를 집어 드는데, 손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내가 몇 마디라도 더 하면, 은영이 딸이 그대로 주저앉아서 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지.
“미안해요.”
“.........”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
한동안 은영이 딸은 말이 없었어. 나 역시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었지. 어떻게 보면 은영이 딸이 미친 듯이 난리를
치더라도 난 그녀를 제지할 방법이 없었을 거야. 그런데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어. 머릿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창 밖을 내다 보더라.
“.... 음.”
어색한 시간이 조금씩 흘렀어. 굉장히 자리가 불편했지만, 나 역시 그대로 일어날 수도 없었지. 차라리 은영이에게
이 사실을 말해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버스였지. 정말 어렵더라. 내가 좋아하는, 사랑하
는 여자의 다 큰 딸이었으니까.
“사실....”
드디어 은영이 딸이 입을 열었어.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몸의 떨림도 멈추고 입을 열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었지.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은영이의 딸은 자신의 어머니와 나의 관계를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알고 있다고 말을 했어. 처음부터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어. 나름 비밀스런 관계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으니,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걱정되더라.
“우연히... 알게 됐어요. 아버지와 오빠는 몰랐지만, 딸은 다르잖아요. 고3때나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가 제가 알고 있던 어머니가 아니더라고요.”
“......”
“많이 변하셨어요. 겉으로 보면 옷차림이나... 화장 하는 거나... 그리고 집에 있는 시간도 많이 줄어 있었고...”
“.......”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어머니 휴대폰을 보게 됐어요. 그리고 알게 됐어요.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미안해요.”
은영이는 나와 한 번 헤어진 뒤로 휴대폰 관리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 전에는 나와 관계 된 모든 기록을 삭제
했었거든. 카톡이나 문자도 보고 바로 지워 왔었는데... 결국 자신의 딸에게 나와 관계 된 기록들을 보이고 말았었지.
“충격을 크게 받았어요. 어디에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던 것 같아요. 당장이라도 아버지나 오빠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무서웠거든요. 어머니에게 부탁을 하고 싶었어요.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고... 그렇
게 부탁하고 싶었는데... 또 무서웠어요. 어머니는 많이 변하셨으니까요.”
“........”
“최근까지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많이 울었어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누구에게 말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름 혼자 고민 끝에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나를 찾아 온 건가요?”
은영이 딸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더라.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작한 가족을,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하고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한 가정을 깨고 싶어 하지 않았어. 은영이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이미 상처를 받았지
만, 모르는 척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은영씨 따님 앞에서 이런 말 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왜죠?”
“사랑하니까요.”
“다른 사람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는 게... 사랑인 건가요?”
은영이를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그녀의 딸에게 말을 해버렸어.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은영이를 포기하는 건
생각하기 싫었어. 은영이는 이미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그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거든.
나의 단호한 태도에 은영이 딸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고, 눈빛도 매우 흔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이 어린 친구
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은 분명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어.
“어머니가 이혼 하신다면....”
“.......”
“저는 어머니를 평생 보지 않고, 원망 할 것 같아요.”
분명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죄책감이 굉장히 컸어. 은영이가 나를 선택하면서 아무리 다 컸다고 하지만, 자식을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런데 어찌됐든, 은영이와 나의 부절적한 관계를 알고 있던 그녀의 딸이 이런 말을
하니까... 난감하더라. 이건 내가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그건....”
“어머니를 놓아주세요. 어머니를 떠나주세요. 그러면.... 모든 게 해결 될 수 있어요. 그러면 저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게요.”
은영이의 딸은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어. 가정을 파괴하는 나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테니, 자신의
어머니와 헤어져 달라고 하더라. 물론, 인간적으로 그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이미 은영이가 자리
를 잡았는데, 나 역시 가위 자르듯 쉽게 은영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거든.
“그건... 아까도 말했지만... 어려워요.”
“아버지와 오빠에게 말하면... 상처를 받겠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또 상처를 받고...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할 텐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요. 그건... 내가 견뎌....”
“아니... 견뎌 낸다고 해서 꼭 행복하리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건...”
말은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지지. 그러다 보면 두서에 맞지 않는 말도 나오긴 하지만, 어찌 됐든 그 상황에서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어. 그런데 다 할 수는 없었지. 사실 내가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은영이 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행위임을 인식하고 있었거든.
계속해서 나에게 부탁하는 은영이의 딸과 그것을 거절하는 나... 이런 자리가, 이런 상황이 나에게 유쾌할 수는 없었
지. 차라리 은영이 딸이 화를 낸다면 마음이라도 조금 더 편했을 텐데... 착해도 이렇게 착할 수가... 어머니의 내연
남에게 부탁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나 은영씨 포기 못해요. 미안해요. 나이를 먹고
다 컸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자로 잰 듯, 이렇게, 저렇게 잴 수는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다는 거 알
아요. 나에게도 많은 피해가 오기도 하겠죠. 그래도 은영씨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이기적이지만... 다 감당하고...
싶어요.”
이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나도 입을 열지는 않았어. 아니, 못했지. 조금만 더 입을 열었다가는 은영이 딸의 눈에서 눈물
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내 말을 다 들은 은영이 딸이 얼마 남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더라.
“황... 지연.”
“네?”
“제 이름이 황지연이예요.”
은영이 딸이 나에게 이름을 알려왔어. 은영이의 가족에 대해 의식적으로 묻지 않았기에 처음으로 은영이 딸의
이름을 알 수 있었지. 그런데 왜 나에게 이름을 알려줬을까? 황지연. 황지연...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어. 어디서
들었더라... 분명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저 기억 안 나세요?”
은영이 딸, 즉, 지연이가 조금은 공격적으로 나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왔어. 그리고 나는 잊고 살았던 황지연
이라는 이름에 대해 기억이 나기 시작했어. 내 과거 속의 한 조각에는 분명 황지연이라는 이름이 있었어.
“서... 설마...”
“맞아요. 제가 그 황지연이예요.”
처음 봤을 때, 낯설지가 않았었지. 그저 은영이 딸이라, 닮았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다고 생각했는데...
황지연... 그녀는... 그녀는....
“오랜만이죠... 선생님.”
은영이 딸인 황지연, 그녀는 과거에 우리 반 학생이었어. 내가 그녀의 담임선생님이었고...
그래.. 지금껏 내 직업을 밝히지 못했는데, 나 역시 은영이와 같은 교사야. 학교 선생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