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좁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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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3 23:56 조회 386회 댓글 0건본문
은영이와 나는 아름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어. 겉으로는 말이야. 그렇다고 속으로 은영이가 싫어지거나, 지겨
워지거나 하지는 않았어. 관계가 관계인지라, 생활은 분명 행복한데, 머릿속은 고민할 거리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결정이 필요한 법인데, 그것을 헤쳐 나가기에는 걸림돌이 너무나 많았어.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은영이는
점차 나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어. 자신의 남은 인생을 나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 같았어. 과연 내가 받을
수 있을까?
간단히 은영이가 이혼을 한다고 하자.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속에서 은영이와 그녀의 가족들은 많은 상처를 받을
거야. 과정을 뜯어보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지만, 이혼을 하고 나랑 산다라고 생각하면, 또 굉장히 단순하단 말이
야. 그런데 쉽지 않다라는 것,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잖아.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도저히 자신이 없더라. 그래서 헤어질 생각도 해봤어. 그런데 그것도 나름
미치겠는 거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고민이 여러 나날 이어졌고, 나는 차마 그 이야기를 은영이에게 할 수 없었어.
어쩌면 우리는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저 하루하루가 행복했기에, 그것만 보고 살았던 것일지도 모르지.
은영이가 여름방학 때문에 시간이 많았던 시기였어. 가정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의 우리 집에서 눌러 살다시피
하던 시기였지. 질리지도 않는지, 섹스도 진짜 미친 듯이 하던 시기였어. 야동을 보면 앞치만 두르고 요리를 하고, 슬립만
입고 다니고, 그런 것을 다 겪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날이 무덥기도 했고... 그런데 모든 걸 다 보고 가졌다고 생각해도, 은
영이가 질리지가 않더라. 매번 먹어도 매번 신선했어. 정말 내가 미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사랑했던 것인지...
그 시기에도 고민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더 이상 고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어. 아니, 발생했지. 어차피 고민한다
고 답이 나올 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고민을 한다는 것이 괴로웠는데, 그것을 해결?해버린 사건이 발생했어.
나는 은영이의 반대로 콘돔조차 쓰지 않았어. 오로지 은영이가 사후 피임약을 먹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은영이 손가방
에서 까무러치게 놀랄만한 물건을 우연하게 발견했어. 예상했을 수도 있겠지만, 임신테스트기 말이야. 그게 내 눈에 띄었
을 때, 진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 그래, 내 생각이 맞았어. 은영이는 진심으로 아기를 원했던 거야.
“하아...”
은영이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까. 그 순간 내 고민을
더 이상 길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은영이와 결혼까지 하는 과정 자신은 없어.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없
어. 내 인생도 완전 망가질 것이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만약 아기라는 소중한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난 도망갈 수 있을까? 그래, 차마 인간으로서 그러지는 못
하겠지. 난 은영이가 가지고 있던 임신테스트기를 못 본 척 했어. 그리고 은영이와 나의 관계를 하늘에 묻기로 결정했지.
계획하지 않은 아기가 생긴다면, 정말로 풀기 어려울 정도로 꼬아버린 인생이 될 거야. 그럼에도 아기가 있다면, 남들이
아무리 욕하고, 삿대질을 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게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지. 그래, 받아들여야지.
어느 날 밤, 섹스를 마치고 은영이를 꼭 안고 속삭였어.
“약... 먹지 마.”
“응?”
“약 먹지 말라구...”
은영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어.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고, 약간의 떨림도 있었던 것 같아. 내 말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았을 거야. 그래서 그렇게 놀라워했겠지.
“자... 자기야...”
“솔직히... 나 모르겠어... 자기 사랑하지만.... 너무 사랑하지만.... 모르겠어... 그냥 하늘에 맡겨볼래...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약 먹지 마.”
“자기야....”
은영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어. 그리고 내 품에 안겨 흐느끼기 시작했지.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은영이는 정말 나에게 모든 걸 걸었던 것이야. 고맙다면서... 너무나 고맙다면서... 흐느꼈어. 차마 여기서 뒷말을 해야하
나 했지만, 그래도 난 할 수 밖 에 없었어. 어쩌면, 난 은영이에게 내 모든 인생을 걸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고마워하지 마... 내가 미안해... 시간을 오래 가져갈 순 없어.”
“그래도... 고마워... 자기야...”
“미안해... 은영아.... 딱... 올해까지만... 올해까지만... 해보자... 나 이해 할 수 있지?”
나를 이해할 수 있냐는 말, 정말 은영이에게 잔인한 말이었을 거야. 역으로 5개월이 채 남지 않았는데, 그 5개월 사이에
아기가 들어서지 않으면, 난 은영이와 이별을 하려고 할 테니까. 이별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평생 살 수는 없
었어. 이기적이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
“응... 나 이해할 거야... 자기... 이해할 거야... 고마워...”
은영이는 끝까지 나를 향해 고맙다고 했어. 그 말이 내 가슴을 찢어 놓더라. 이렇게 도망 갈 생각만 하는 나에게 고맙
다는 말을 하는 그녀, 정말 걸림돌만 없다면 평생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어. 걸림돌만 없다면... 말이야...
그 후로 본격적으로 은영이와 나는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했어. 막상 아기가 생기더라도 큰 문제인 것이 은영이는 가
정이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이었지. 어쩌면 정말 대책이 없던 계획이었어. 그저 은영이와 내가 이별하지 않는 끈을 만
드는 것에 집중을 했었으니까. 그거 하나만 보고 이런 무책임한 짓을 시작했으니까.
난 결혼을 하지도 않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전적으로 은영이의 지시를 따랐어. 술도 마시지 않았고, 규칙적으
로 운동을 했고, 식단까지,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 섹스 횟수도 많이 줄였어. 가장 확실한 날짜에 좋은 컨디션으로
집중을 했어. 그저 은영이가 시키는 대로 최선을, 정성을 다했어. 심지어 병원에 가서 검사까지 했었지.
그런데 임신이라는 건 쉬운 게 아니었어. 남들은 찢어진 콘돔을 통해서도 임신을 한다지만, 사실 은영이 나이가 적지
않아서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 예상을 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있었고, 은영이는 갈수록 초조해 하는 것 같
았어.
“나 때문이야... 내가 나이가 많아서...”
은영이는 입버릇처럼 자신을 탓했어. 그리고 우울해 하는 날이 많았지. 그 모습을 보니까, 너무나 미안하더라. 그래서
지켜보는 나 자신도 매우 힘들었어. 은영이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줬고, 그녀는 그럴 때마다 또 밝은 표정으로 웃어줬
지. 매우 슬픈 눈으로 말이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났으며, 이제 제법 추운 초겨울이었던 것 왔어.
눈이 많이 내렸어. 밤에 은영이와 예전에 데이트를 즐기던 공원에서 눈을 맞으며 산책을 하고 있었지. 굉장히 눈이 많이
내렸는데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어. 이제 진짜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
“눈 내리니까... 참 예쁘다...”
“그래... 그래도 자기가 더 예뻐.”
“치... 거짓말...”
이렇게 하늘에서 눈이 많이 내리는데, 왜 하늘은 아기를 내려주지 않는 것일까? 눈과 아기를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되지
만, 그래도 이렇게 내리는 눈처럼 아기를 보내주면, 행복한 산책을 하듯이 인생을 살아 나갈 텐데 말이야.
“나... 이제 포기 하려고...”
은영이가 나에게 말을 했어. 그녀는 마음의 병을 안고 있었어. 괜한 나 때문에... 지쳐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야...”
“처음부터 욕심이었는지 몰라.... 벌써...내년이면...오십인데....”
세월이 그렇게 흘러버렸어. 진짜 한 달만 지나면... 은영이는 반 백세가 되는 거였어. 그런데 겉만 봐서는, 아니 마음을
보더라도 그건 절대 아닌데 말이야. 지나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도 없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라는 생각만 들더
라.
“여전히 아름다운데 뭘....”
“말만이라도 고마워.”
“진짜야.”
“그래도 자기 밖에 없네...”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은영이를 안으면서 눈 쌓이는 길을 걸어 나갔지.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럴
수록 가슴이 아파오더라. 이렇게 눈 맞으며 눈 쌓인 길을 은영이와 걷는 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잠깐 쉬었다 갈까?”
은영이와 내가 만났던 벤치는 이미 눈으로 가득이었어. 내가 손으로 눈을 쓸어 내렸고, 물기가 있었지만, 그녀와 나는
옛날처럼 벤치에 앉아서 떨어지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봤어. 조명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나름 분위기가 있었지.
“은영아...”
“응.”
인생이란 때론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이야. 계획하지 않았던 일의 연속이기도 하고... 가끔은 나조차도 나를 못 믿을
때가 있지. 그리고 나 자신조차 나를 모를 때가 있는 게, 인생이고... 그때 내가 그랬어.
“나 말이야...”
“응.”
“은영이 너랑....”
“응.”
“결혼 할까 봐.”
이날, 세상에 내린 눈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던 은영이었어. 하지만, 그 누구보다 그녀의 눈은 행복해 보였어. 그제야
내 가슴도 따듯해지더라.
하늘은 개뿔... 이게 정답이었던 거야... 우리 둘 사이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