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그리는 남자 - 상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2 09:10 조회 710회 댓글 0건본문
*누드 그리는 남자 - 상*
우중충한 날씨, 잿빛 하늘이며 곧 쏟아내릴 것 같은 빗물을 가득 머금은 검은 구름이 하늘
에 힘겹게 떠있다. 막히는 도로와 여기저기 귀를 괴롭히는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나는 미간
을 찌푸리지만 그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알 리가 없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
지...
나는 건물마다 한 두 개씩 널려있는 병원을 찾아 오늘도 그 앞을 서성인다.
‘아~ 저 여잔 키가 너무 작아~... 그 옆은 너무 늙었어!’
대부분 개인병원엔 두 명 내지 세 명의 간호사들이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그
이미지의 여자는 여전히 찾질 못하고 있었다.
‘씨발... 아무나 작업해버려? 좆도......’
지금껏 2개구를 이잡듯 뒤졌다. 하지만 내가 찾는 여자는 없었다. 아니, 고객이 찾는 여자는
없었다. 고객과의 약속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가 가장 힘겨울 때이다.
사실 두 명의 여자를 찾긴 했었다.
그러나 그저 겉모습일 뿐 속 내용은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것이 되질 못했다.
내가 작업을 하는데에 있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거짓이나 눈
속임은 나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했다.
내가 작업을 해서 먹고 살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방금 전 돛대를 피워내고 남은 것은 낡은
라이터뿐이었다.
“던힐 라이트 한 갑이요”
바로 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는데 종업원이 내가 찾는 여자의 외관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직업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에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아깝다는 생각뿐이다.
‘젠장 찾으려고 하면 안 나타나고... 오늘도 허탕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편의점 앞의 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을 쏟아낸다.
여전히 체증을 겪고 있는 강남의 거리는 나의 마음과도 같았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벌써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화가님이 젊으시네요?”
고객은 40대로 보이는 중년남성이었다. 앞머리부터 정수리까지 빛나고 있는 머리와 좋은 풍
채를 봐서는 중견기업이상의 간부급이거나 경영자로 보였다.
“젊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도 될 지...”
언제나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젊은 외모 때문인지 나이를 묻곤 했다.
“하하하... 원래 그림쟁이나 예술가한테 나이를 묻는 건 실례입니다.”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올 해 서른셋 됩니다”
“하하하... 젊은 혈기에 좋은 일 하십니다! 하하하”
다소 건방지다고 생각할 만한 대답을 고객은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사실 나 같으면 어린놈이 꼴값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이런저런 얘기를 섞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불편한 만남을 어서 끝내고 자리
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신의 성관념에 대해 이해를 시키려
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에 있는 고객도 다르지 않았다.
“뭐.. 내가 꼭 이런 걸 좋아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고객님! 저는 저의 고객님들의 성적 취향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
고 저로 인해 성적이건 마음의 안정이건 고객님들의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
족합니다. 그러니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주저리 말이 길어 길 것 같은 고객의 말을 잘라 맺음을 지어 주었다.
“젊은 친구가 호탕하기까지 하구만...”
“걱정 마십시오. 저는 물론이고 고객님께서도 지금의 작품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해주셔야 하
거든요... 판권자체에 대한 소유권도 물론 고객님 것이 되니 그림에 관한 것은 걱정하실 필
요는 없습니다.“
고객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오면서 자신의 변태스러움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는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오?”
“음... 최대한 고객님께 맞춰드립니다. 외모, 직업, 때에 따라서는 원하시는 분을 꼬집어 말
씀하셔도 작업가능하고요... 단 모델에 대한 포즈나 표정,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결정되
어야 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구도로 갑니다.“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나의 뜻을 밝혔다. 화가라는 자존심을 최소한 지켜내기 위함이
었다. 간혹 포즈나 표정까지 요구를 하는 고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긍을 했고 앞에 앉은
중년남성도 기꺼이 수락했다.
“간호사로 해주시오! 청순하면서도 섹시미를 가지고 있는 미인형에 C컵정도 되는 무식하지
않은 풍만한 가슴이면 좋겠고 엉덩이가 좀 컸으면 하오. 피부는 좀 흰 편이면 좋겠고...“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작업을 하기가 좀 힘듭니다. 물론 불가능
한건 아니지만요... 고객님 이메일 주소 하나만 적어주십시오... 모델 찾으면 사진을 찍어 보
내드리고 오케이 하시면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그가 말한 여성상은 너무도 추상적이었다. 그저 글래머에 피부가 흰 예쁜 간호사라고 말하
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예쁜데다 가슴까지 큰, 그것도 간호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 착수금은...”
“모델료, 계약금, 활동비까지 해서 500만원 주시고 작업 완료후에 잔금 치러주시면 됩니다”
“음...”
“비싸다고 생각 드십니까?”
“뭐.. 비싸다기보다는...”
“사실, 그런 야한 그림.. 더 싼 값에 사실수도 있죠... 하지만 고객님에겐 생명력이 없는 그
림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천 만원이 훌적 넘는 돈이면...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음... 그런가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서 보겠습니다. 저의 작품을 그렇게 싸구려 취급하시
는 분과는 더 이상 작품에 관해 얘기를 하고 싶지 않네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기분이 나빴다. 간혹 그림 값에 대해 흥정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엔 모델료며 나의 생각을 줄줄이 늘어놓고 이해해주길 바랐지만 그럴 때 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씨발놈.. 차라리 안 그리고 만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화가도 아니었지만 내 그림을 놓고 흥정을 할 정도로 배가 고프진 않았
고 그 정도로 예술가의 혼이 썩어 빠지진 않았다.
남들은 나를 보고 돈을 밝히는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나름대로 예술혼을 그 그림들에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미안하오~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 진심으로 사과 하겠소”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번 계약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기분 나쁜 것 이해하오... 그러니 재고를 부탁하오.”
중년남성은 나의 손을 붙잡으며 사과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사과가 나의 기분을 더욱 나쁘
게 만들었다.
“제가 일개 포르노물을 그리는 사람으로 보이셨나보군요. 그리고 제가 그린 그림을 그저 그
런 그림으로 보신거구요...“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무식한 놈의 실수를 한 번 봐주오~”
대부분 욕을 하며 나를 무시했다. 야한 그림이나 그리는 주제에 콧대가 세다며...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진심으로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었고 나는 다시 엉덩이를 소파에 붙였다.
“그럼 여자 분의 성기는 가려드릴까요? 아니면....”
“그건 화백님께서 원하는대로 하시오~”
“그러지요... 그럼 어쩔 수 없지만 나중을 위해 계약서를 쓰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문득 잠시 쉬는 사이 고객과의 계약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델을 구하는 일이
이토록 힘겨울 줄은 몰랐었다.
담배꽁초를 튕겨내고 다시 한숨을 크게 내뿜었다. 대부분 한 달 정도 걸리는 작업이 3주동
안 모델도 찾지 못하고 있음에 나조차도 조급함이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일어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가로 보이는 많은 병원들이 보였지만 선뜻 감이 오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시일이 다가옴
에 따라 나는 다시 발품을 팔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헛걸음의 연속이었다. 얼굴이 괜찮다 싶으면 가슴이 작고 가슴이 크다 싶으면 얼굴
이 죽사발이었다. 그런대로 얼굴과 몸매가 된다 싶으면 나이가 많아 보이거나 몸의 비율이
맞지 않아 작품성이 뒤떨어질 만한 여자들뿐이었다.
‘아~ 대한민국 간호사의 퀄리티가 이리도 떨어졌었나?’
터져 나오는 한숨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미 어둠의 그늘이 온 세상을 덮고 병원들
의 실내등이 꺼져나갔다.
성형외과라 해서 간호사들이 예쁘진 않았고 치과라 해서 웃는 모습이 아름답지는 않았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다시 옮겨 집으로 향하는 동안도 나의 아쉬움은 계속 이어졌다.
다시 해가 밝고 다음날이 되어 다시 집을 나섰다.
집이자 작업실... 형광등의 불을 내리면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 가득한 그 곳을 등
지고 다시 간호사를 찾아 나섰다.
‘강남이라고 뭐 볼 것도 없었어... 씨발 오늘은 어디로 가나~’
캔커피 하나를 들고 담배를 피워내고 있을 때였다.
출렁출렁...
나의 눈에 띈 거대한 두 개의 덩어리를 덜렁이며 어딘가 바쁘게 뛰어가는 백의의 천사.
갈색의 웨이브진 머릿결과 흰 피부, 잘록하진 않지만 두껍지 않은 허릿통 아래 큼지막하게
위치한 탱탱한 엉덩이.. 이미 그 것 만으로도 눈을 동그랗게 만들어 주기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목에 걸려있는 카메라로 그녀를 찍기 시작했다.
셔터소리와 함께 메모리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그녀,
165cm 정도의 적당한 키와 섹시미가 풍기는 날렵한 눈매, 도톰한 입술이 인상적인 간호사
는 삼각 김밥을 사들고 다시 길 건너편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이미 신호가 바뀌어 그녀를 놓칠 뻔 했지만 길 반대편에 위치한 ‘박소아과’로 들어가는 흔
적을 잡아낸 나는 바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동네 소아과에 저런 천사가 있을 줄이야~’
한동네에 살면서도 한 번 정도는 마주칠 법한데 처음 보는 여자였다.
바로 메모리에 담긴 사진들을 추려 이메일을 보낸 후 전화통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며칠전
부터 작업현황에 대해 의심을 품던 ‘황 이사‘였다.
[네.. 황중보입니다]
[황 이사님? 저 이 화백입니다.]
[어..어.. 이 화백님.. 어떻게 좋은 소식 좀 있는 건가요?]
나의 존재를 밝히자마자 물어오는 것은 모델의 선택 유무였다.
[예.. 아마 마음에 드실 것 같습니다.. 메일 확인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호탕하게 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은 황 이사는 10여분 정도 지난 후 바로 연락을 해 왔다.
목소리부터가 잔뜩 기대에 부푼 목소리였다.
[이 화백님...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그 여성분 100% 섭외는 가능한가요?]
[노력 해봐야죠.. 지금까지 성공률은 70%정도 됩니다.]
[부탁 좀 하겠소... 오늘 밤부터 그 여자가 꿈에서도 나올 것 같구려~ 허허허]
[그럼.. 또 연락드리죠~]
가장 힘든 모델 섭외가 남아있었다.
이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다.
고객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모델선별부터, 모델의 섭외.. 그 후에도 알몸을 드러내게 해야
했다. 더구나 성기의 노출은 왠만한 노력이 아니고선 성공확률이 높지 않을 정도였다.
‘자~ 이제... 먼저 만나서 나를 알려야지....’
일의 성공여부는 솔직함이었다. 괜히 돈으로 사람을 유혹하거나 속이려들면 내가 가늠한 것
보다 훨씬 단단한 벽이 쳐지기 마련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의, 아니 수많은 실패를
통해 깨달은 진리였다.
누구나 편견이 있듯이 소아과에 근무를 하는 것 자체부터 나를 겁먹게 만들었다. 소아과라
는 어감이 주는 이미지는 그녀마저 맑고 순수한 여자로 착각하게 만들은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직업과는 별개로 성적인, 게다가 캔버스의 한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여자의 마
음을 잘 이용해야했다.
거칠게 길었던 수염까지 말끔하게 깎아내고 잘 바르지도 않는 젤까지 쳐바른 뒤 최대한 깔
끔한 복장을 하고 그녀가 있는 ‘박 소아과’의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섭외작업을 할 때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기 때문에 심호흡을 몇 차례나 한 뒤
나를 추슬렀다.
운이 좋게도 어제까지 흐리던 날씨가 화창하게 개어있어 나를 돕는 듯 했다. 날씨도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어서오세요~”
웃으며 반겨줄 것 같던 백의의 천사는 어디론가 숨어있었고 애가 둘 정도 딸린 것 같은 중
년으로 보이는 간호사가 나와 눈을 맞추려 애를 쓰고 있었다.
‘아놔.... 이름이라도 알아내고 오는건데....’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허둥대던 나는 주사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고 하얀 피부에 엷은 피부막을 자랑하는 그녀의 육중한 가슴
으로 새와 같이 높은 시력을 자랑하는 눈동자를 맞췄다.
‘주.예.진’
얼굴과 이미지에 잘 맞는 예쁜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저기...”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는 순간 수간호사로 보이는 중년의 간호사가 손바닥을 내보
이며 말을 가로막았다.
“저희 지금 업무중이라... 대출 받을 사람 없거든요!”
황당했다. 기껏 멋을 내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것이 대출영업인으로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
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물론 앞에 서있는 중년 간호사는 싸그리
무시한 채 예진에게 말을 건넸다.
“저.. 예진씨? 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명함을 건네자 중년의 간호사는 화가라는 말에 자신의 말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자리
를 피해 주었고 아이처럼 놀란 표정으로 명함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림으로, 나의 작품안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의 미모와 몸매였다.
“그런데.. 어쩐일로....”
“말씀드리기가 좀 쑥스럽긴 하지만 며칠 전부터 예진씨를 봐 왔습니다. 우연찮게 뵌 분이지
만 사실 가지고 계신 이미지가 너무 청순하고 맑아 제 그림 속에 담고 싶어 이렇게 찾아 왔
습니다.“
며칠 전이라는 말만 거짓일 뿐 마음의 진심을 전하려 노력했지만 탐탁찮은 반응이었다. 그
러나 돈을 떠나 꼭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기에 물러설 수는 없었
다.
“저를 그리고 싶으시다구요?”
“네... 진심입니다.”
“에이... 농담이시죠? 저 같은 게 어떻게 화가님의 그림에...”
“저 같은 게 라뇨? 저 아닌 누구라도 예진씨를 보면 그리고 싶어 할 겁니다.”
“정말이세요? 농담이시죠?”
“정말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장난스레 웃음을 머금는 예진이었다. 누구나 비슷한 반
응을 보인다. 여자라면... 지금 그녀도 다른 여느 여자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요즘 이런 식으로 사기 치시는 분들 많다던데....”
역시 자주 들었던 질문이었다. 이것을 설명하고 나면 혹시 누드가 아니냐고 물어올 것은 자
명한 일이었다.
“사기라뇨... 경찰 손 붙잡고 오시거나 다른 분들과 같이 오셔도 됩니다. 아니면 화가협회에
전화 하셔서 저를 확인해 보셔도 되구요~“
주민증을 꺼내 보여주며 재차 확인을 시켜주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린 예진은
손사레를 쳐댔다. 오버스럽긴 하지만 나에 대한 신뢰를 쌓아주기엔 보다 완벽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럼.. 무슨 그림인데요? 혹시 누드 같은 거 그리시는 거 아니예요?”
보통여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내 계획과 예상 질문들이 나온다는 것은 성공률 90%이상이
라는 결과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왜요? 누드 같은 거 모델 돼보고 싶으세요? 하하하”
이미 ‘누드 같은 거’ 라는 말의 의미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이미 눈치 챘지만 그녀의 마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어머! 농담이시죠? 누가 그런 걸 하겠어요~”
관심은 있다. 하지만 누드는 안 된다 라는 결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대화가 오간다는 것은 뜻만 맞으면 하겠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누드는 그것에 대한 지식
이 부족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부정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여성들 모두 그러했다. 하지만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는 법!! 끝까지 긴
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미 결론은 누드가 아니라면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오늘 몇 시에 끝나시나요? 별 일 없으시면 혼자도 좋고 친구와 같이
오셔도 좋고 제 작업실 한 번 들러 주시면 좋겠는데요....“
특별한 대답 없이 명함을 바라보는 예진이었다. 분명 작업실의 주소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머.. 이 동네시네요?”
“네~ 길 건너 5분정도 걸립니다.”
“저기... 죄송한데 저는... 그냥 안할래요....”
“아! 그러세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조금 아쉽긴 하네요...”
“죄송해요... 그냥 용기가 안 생겨서....”
예진은 하기 싫다기 보다 주위의 이목과 자신감 결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
구보다도 꼬시기 쉬운 타입. 분명 남자친구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시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안하셔도 되니 제 작업실 한 번 들러주시죠. 제
그림도 오셔서 좀 봐 주시고 화가 친구 한 명 사겨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저도 간
호사 친구 한 명 얻고요~ 꼭 오실꺼죠?“
“네..네~ 한 번 들를께요~”
“혹시나.. 겁나시면 남자친구분이랑 같이 한 번 오세요... 선물로 캐리커쳐 하나 해드리죠~”
“네.. 남자친구 생기면 꼭 해주셔야 해요~”
“언제든 오세요... 제 작업실은 항상 만인에게 열려 있으니까요~ 그럼 수고 하세요”
나는 밀려들어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장담하진 못하겠지만 며칠내로 그녀에게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대로 빗나갔고 연락은 오지 않았다.
초조하진 않았다. 그저 작업의 시일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는 것이 조급할 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전화 한 통이면 미룰수도 있었지만 약속이 미뤄진다는 것 자체를 내가 용납할 수 없
었다. 무엇보다도 예진을 작업실로 데리고 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작업이야 며칠이면 끝낼
수 있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이번엔 우연을 가장 해야겠군!’
화구박스와 커다란 캔버스를 챙겨들고 그녀의 퇴근 시간을 맞춰 숨어야만 했다. 꼭 그녀를
그려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닌 그녀의 맑은 미소를...
주위를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도 어쩔 수 없었다. 예진을 꼬시기 위
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어둠이 져가며 중년의 간호사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고 바로 뒤를 이어 예진이 문
을 잠그고 있었다. 예진과 중년 간호사가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미리 알아둔 것이 일치했
다. 예진은 내가 숨은 방향으로, 중년 간호사는 반대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짐들을 챙겨들고 낑낑거리며 힘겨운 척을 하며 점점 그녀에게 다가서다 화구박스를 바
닥에 내려놓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척을 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걷던 예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도 나를 대번에 알아차
렸는지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황당함이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 보였다.
“어? 예진씨!”
“어?”
어느새 인도의 구석진 곳에서 마주친 예진과 나는 서로 웃는 얼굴을 보내주고 있었다. 예진
은 화가라는 말이 그제서야 몸에 와 닿는지 각종 화구들을 보고 웃음을 지어냈다.
“이제 퇴근 하세요?”
“아..네~ 그림 그리러 다녀오시나 봐요?”
“네~ 바닷가 갔다가 오는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모른 척 스쳐 지나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금세 달아났다. 다행히 나를 알아보고 게다가
뜻밖에 반가움으로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혹시 저 없는 동안 다녀가신 건 아니죠?”
모르는 척 한 번 들르라는 청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헤헤 갔었는데...”
“아!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장난을 치려는 건지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예진은 곧 진실을 털어놨다.
“사실은 못 갔어요...”
“하하하... 낚였군요... 저기.. 예진씨 나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네? 부탁이요?”
“지금 짐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이것 하나만 들어다 줄래요? 작업실 가서 맛있는 커피 대
접 할게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예진이었다. 두 번째 스친 인연이지만 여자로서 냉큼 따라나서기가 쉽
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여자일수록 더욱 몰아 세우
고 적극적으로 나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진은 수락도 거절도 못한 채 난감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나요? 미안합니다.”
작업실로 데려가기만 한다면 예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림이며 언
제나 지원을 해주는 선배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진은 얼굴은 긍정을 표하
면서도 언제나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낑낑대는 척 화구와 캔버스를 짊어지고 자세를 잡았다.
“그럼, 다음에 꼭 한 번 오세요~”
인사를 하고 예진을 스쳐 지나는 순간 왼손에 들린 화구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
팽개치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싶었지만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예진씨... 그건 무거워요... 이거 이젤만 좀 들어 주세요~”
“괘.. 괜찮은....”
물감이 가득 든 화구박스를 뺐어들고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가벼운 이젤을 넘겼다. 나 혼
자도 충분히 들 수 있는 것이라 괜히 무거운 것을 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진씨는 생긴 것도 예쁘신데 마음도 예쁘시네요.. 저 같으면 아마 안 들어 줬을 것 같은
데”
“저도 안 들어주려다 들어드리는 거예요..”
“하하하하... 고마워요~ 아주 고마워 죽겠습니다!! 예진씨는 집이 어디예요?”
“바로 옆동네에요~ 마을버스타면 10분 정도 걸리나?”
“아~ 가깝네요...”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쓸데없는 말들 중 공통점이나 연결된 고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녀와 가까워 질만한 단서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건 뭐... 이대로 가다간 여자 꼬시는 선수 되겠네....’
물론 선배나 후배, 또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모델을 건져와도 되기는 했지만 작품으로 그려
낼 때 내가 고생한 것이 훨씬 생명력이 넘치게 그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에 저는 작업 거는 건 줄 알았어요~ 후훗!”
“작업이요? 하하하...”
“근데 정말 저를 그리고 싶으신 거 였어요?”
“음.... 작품 끝내놓고 작업 걸려고 했는데요?”
“재밌으시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화백님? 화가님? 아니면... 편하게 오빠?”
“오빠가 좋은데요? 친근감 있고... 사실 여동생이 없어서 가진 놈들이 부러웠는데...”
“오빠? 진원오빠? 성함이 이진원 맞죠?”
“듣기 좋은데요? 오빠.... 흐흐흐”
“웃음소리... 어흐~ 변태같애...”
쓸데없는 말에 이어 점점 경계가 풀리기 시작했는지 예진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
게 느껴졌다. 단 두 번 만에 오빠라는 말을 쓰는 여자에게 누드모델을 대놓고 요구할 수는
없었지만 곧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다.
/철컹!/
반지하 특유의 냄새와 유화물감의 냄새가 섞여 코를 찔러왔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냄새가 풍기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실내등을 켜자 미리 청소를 해둔 작업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곳곳에는 헐벗은 여자들의 누
드화가 걸려있거나 세워져 있고 그것들과 같이 풍경화며 초상화까지 각양각색의 그림들이
제 위치에 자릴 잡고 있었다.
“고마워요~ 저기 소파에 잠시만 앉아 계세요 금방 커피 드릴께요~”
“작업실이라더니 의외로 깔끔하네요? 그림 좀 봐도 돼죠?”
“그럼요... 훔쳐가는 건 안돼요~”
커튼으로 가려진 주방 겸 다용도실로 들어가자마자 커피 물을 올리고 서둘러 선배에게 전화
를 걸었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가 예진과의 소통을 단절시켰다.
[여보세요? 그래 진원아~]
[선배! 나 좀 도와줘]
[무슨 소리야? 아~ 너 또 작업중이구나?]
[어... 돈 좀 어느 정도 뽑아오고 누나는 누드모델... 알지?]
[그럼.. 한 두 번 해보니? 그나저나 선배든 누나든 둘 중 하나로 불러!]
[알았어~ 빨리 와~]
대학 2년 선배인 정은은 항상 나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작업의 도우미였다. 이미 나도 정은
도 서로의 누드를 그린 친하고 가까운 사이였기에 껄끄러울 것은 없었다.
끓는 물을 따라 커피를 들고 나서자 그림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예진은 종종걸음으로
소파로 다가와 사뿐히 내려않았다.
그리고 건넨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는 커피잔이 풍기는 따뜻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림이 굉장히 많네요?”
“많긴요... 그냥 심심할 때마다 그린 건데요~”
“누드도 그려요?”
“네! 간간히 그려요~ 대부분 여자분들이 소문 듣고 찾아와서 그려달라고 해서 그리는 거지
만요...하하하“
“여자가 먼저 찾아 온다구요?”
“네!... 물론 모델을 따로 부르기도 하지만요”
“아~~~”
예진 역시 다른 그림들 보다 누드로 가는 눈길이 잦았다. 그저 젖가슴만 내민 그림부터 성
기까지 세세하게 묘사된 누드들도 많았기 때문인지 예진은 홍조를 띄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나체를 그려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였을 것이었다.
“오빠! 오빠도 전시회 같은 거 해요?”
“음.. 예전엔 했는데 요즘은 잘 안 해요. 마음에 드는 그림도 없고 모델도 없고....”
“아~ 그렇구나...”
“마음에 드는 그림 있어요?”
“네?”
실제로 보니 화가라는 것을 의심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계속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예진
은 나의 물음에 다시 소파에서 일어서 한쪽 구석으로 발길을 옮겨갔다.
그리고는 한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림을 집어 들었다. 반라에 상반신만 그려진 그림
으로 애절한 눈빛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요?”
“네... 그냥 굉장히 슬퍼 보여요...”
“혹시 행복한 눈물이라는 작품 알아요?”
“그럼요~ 디게 유명한 작품이잖아요~”
“사실 그거보고 따라 그려 본 거예요... 상상으로 그린건데 한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
각하며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기전의 모습을 그렸죠... 그러니 그건 행복한 눈물과는 정반
대인 치욕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 일종의 패러디 작품이네요?”
“뭐 그런 셈이죠.. 마음에 들면 가져가세요...”
“저...정말요?”
“네... 나중에 저 유명해지면 또 알아요? 행복한 눈물만큼 비싼 그림이 될 지...”
“그때 다시 돌려 달라기 없어요!!”
어줍짢은 그림선물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사실 내가 유명해진다면 성인누
드화로 유명세를 얻을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선물한 그림도 한 축을 이뤄 낼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썩어빠진 예술혼으로 유명해지기는 커녕 도태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만큼 이미 내 자신은 내 스스로도 많이 타락해 있었다.
“예진씨!”
“그냥 말 편하게 하세요... 거리감 있게 느껴지잖아요...”
“그..그래도...”
“오빠가 먼저 말 놓으면 저도 차차 편해질 것 같아요”
“그..그럼 그렇게 할까?”
“그렇다고 바로 놓는다...헤헤”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목표치에 어느 정도 다다라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진의 성격상 지지부진한 힘겨루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예진아~ 혹시 내 작품에 주인공이 되어 달란 말... 생각해봤어?”
“진짜 날 그리려고요?”
“난 맘에 없는 소리 안 해...”
“어떤 그림인데요? 혹시 누드?”
언젠가는 밝혀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여자와는 틀렸다.
나조차도 예진에게 누드모델을 쉽게 논하지 못 할 만큼 그녀의 몸은 옷 위로도 야하고 섹
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런 생각에서 이미 난 예술인임을 포기한 모습 그
대로였다. 나조차도 누드라는 것을 예술이라기 보단 외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진에게만큼은 말이다.
/똑! 똑!/
올 것이 들이닥쳤다. 정은의 등장일 것이었다.
나와 같이 예진도 작은 노크소리에 반응을 하며 출입문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두려움과 긴
장감이 흐르는 표정이었다.
“누구세요?”
정은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예진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문을 열어 정은을 맞이했다.
“어? 정은씨~ 어서와요~”
“안녕하셨어요? 어? 손님이 계시네?”
“괜찮아요.. 어서 들어와요~”
언제나 그렇듯 화가보다는 연기자가 어울릴 만큼의 연기력을 선보이는 선배였다.
은근슬쩍 예진의 눈을 피해 뒷주머니에 하얀 봉투를 꽂아 넣어준 그녀는 당당하게 소파로
발길을 돌렸다.
수수한 남방셔츠에 짙지 않은 화장의 수수한 얼굴, 청바지를 받쳐 입은 정은의 모습은 수수
한 일반 여자와 같았다.
“어머? 화가님! 저기 예쁜 분도 모델이예요?”
“하하하... 모델 좀 해달라고 해도 안 해주네... 그냥 친구예요, 예진씨! 이쪽은 정은씨...”
천연덕스레 둘을 소개 시켜주고 나는 커텐 안으로 몸을 피했다.
정은을 부른 것은 같은 여자로서 누드에 대한 선입견을 깨주기 위한 작업이 진행이 될 것이
었다.
대충 들은 말로는 누드라는 외설같은 예술의 순수함을 설명한다는데 남자인 나로서는 정은
의 말을 잘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분명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은 분명한 듯했다.
그저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여느때처럼 정은이 신기에 가까운 말빨을 통해 예진이 누드
라는 단어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만이라도 털어내길 빌 뿐이었다.
일부러 빨리 나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끈다면 우리 둘의 연기를 눈치
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모자르지도 남지도 않는 아주 적당한 시간
이....
이미 물은 팔팔 끓어 어느 정도 증발이 되어 한눈에 봐도 줄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약 6~7분정도의 텀.
나는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 들고는 커텐 밖으로 모습을 비췄다. 마술을 부려도 어찌 부렸는
지 예진의 맑은 눈망울이 정은의 눈에 고정되어 빠져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쓰!! 됐다!!’
내가 다가서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정은과 예진은 웃음을 머금기도 하고 볼에 손을 대
며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어머! 그럼 오늘 언니 그리시는 날 이예요?”
“어... 구경하고 갈래?”
언제부터인지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언니와 동생사이처럼 편안해 보이는 그녀들이었다. 이
미 물밑작업은 끝이 난 듯 보였다.
“그.. 그래도 돼요?”
“예진이 너 아직도 누드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못 버렸구나?”
“뭐.. 솔직히...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직접 보면 달라 질꺼야... 남아있는 생각도~ 바쁜 일 없으면 보고 가도 돼! 돼지 같은 몸매
지만 그림 속에 들어간 내 모습을 보면 너무 예쁘고 멋져 보이거든...“
“정말 그래요? 저도 어디선가 본 것 같긴 한데.. 인터뷰하는 거~”
여자들의 수다는 한 번 터진 봇물처럼 끝이 없었다.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약간의 한기가
느껴지는 작업실의 공기를 덥혀야만 했다. 곧 섭외의 정점에 다다를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
었다.
“어? 화백님 오신다!”
정은은 눈을 찡긋거리며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어냈고 전보다 밝아
진 예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은 앞에 커피를 놓아주고 리모컨을 들어 온풍기를 가동
시켰다.
“따뜻한 커피 좀 마시면서 몸 좀 풀어요... 곧 따뜻해질 꺼예요. 온풍기 틀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해내갔다.
벌써 몇 년째 거의 제자리인 정은의 알몸 스케치가 담긴, 그리고 부분부분 색이 입혀진 캔
버스를 이젤에 올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몸에 닭살 돋으면 퀄리티 떨어지니까 충분히 따뜻해지면 시작하죠”
“네.. 아! 화백님.. 예진이가 그리는 거 구경 좀 하고 싶다는데~ 그래도 되죠?”
시나리오에 맞게 정은은 작업을 지켜봐도 되는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다. 나는 일부러 담담
하면서도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정은씨만 괜찮으면... 저는 상관없어요”
역시 언제나 하던 말을 되풀이 해놓자 박수까지 치며 예진을 향해 말을 건네는 정은이었다.
“거 봐.. 된다고 했지? 구경하고가~”
대답대신 눈을 접으며 웃음을 지은 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정은이 등장하면서부터 순조롭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성사가 된다면 무엇보다 좋
을일이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또 얼마나 우려먹을지 겁부터 덜컥 났다.
“근데 화백님... 예진이 작품으로 하시면 정말 대작 나올 거 같은데.. 잘 좀 꼬셔봐요..”
언제쯤 나올까 하는 질문이 드디어 터져 나왔다. 분위기상 딱 지금이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괜히 눈을 지긋이 내려 깔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충실한 내공연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은씨! 꼬시다뇨!! 좋은 작품은 제 손에서 나오는 게 아니예요. 모델, 또는 사물.. 그려지
는 모든 것들의 진심어린 감정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고 말했잖아요!“
“죄...죄송합니다.”
“유독 정은씨의 그림이 좋은 작품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모두 정은씨의 마음 때문이었
던 것 잊었나요?“
순식간에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일부러 만든 냉랭한 분위기지만 예상보다 예진에게 잘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화가 난 척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커튼 안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이제 마지막으로 돈의 유혹을 던져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봉투에 액수까지 볼펜으로 적어준 정은의 정성에 다시 한 번 감동하는 나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동안 정은이 누드에 대한 깊은 매력과 철학을 마무리 하고 있을 것이고 이
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면 깨끗이 예진이란 모델은 포기를 해야 했다.
분명히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려지는 모델의 생명력이 그대로 작품
을 통해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내가 전문모델이나 돈을 주고 사는 모델을 그리지 않는 이유였다. 분명 그녀들이 훨
씬 능욕적이고 포즈의 자연스러움이 좋았지만 설레임과 풋풋함은 아마추어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닳고 닳은 여자보다 순수한 숫처녀를 좋아하는 남자의 본능을 일깨우기 가장 좋은 표정과
포즈가 그려지는 조건이 그것이었다.
나는 봉투를 손에 들고 다시 그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앉았었던 자리에 자리를 잡고
봉투를 정은을 향해 건넸다.
“정은씨 화내서 미안해요... 예진씨 놀랐지? 미안...”
“아.. 아니예요~”
적잖이 놀랐는지 예진은 바로 대답을 내놓는 반면 정은은 고개를 숙인채 미안함의 연기모드
를 보여내고 있었다.
“정은씨? 미안... 이거 저번 작품 모델료예요~ 200만원이니까 한 번 세어 봐요”
“저 모델료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전 그저 그려지는 것이 좋을 뿐인걸요~”
“정은씨의 그런 마음 때문에 작품이 잘 나오는 거예요... 그건 그거고 수고하신 것은 받으셔
야죠... 어서~“
“가.. 감사합니다.”
정은은 내민 봉투를 받아 바로 핸드백으로 감추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연기일 뿐이었
다.
“세어 보세요... 어차피 계약까지 했으니 확실한 게 좋잖아요... 어서요~”
정은은 현금과 수표가 잔뜩 섞인 돈 뭉치를 대충 세는 시늉을 했다.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예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작업은 끝이었다.
충분한 동기부여, 그에 따르는 합당한 댓가,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작품...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흔들리다 못해 이미 마음을 정한 것처럼 보이는 예진이었다. 자신의
한 달 월급보다 많을 돈이 마지막으로 갈팡질팡하던 그녀의 마음을 마구 흔들었을 것이다.
“기분 풀렸어요?”
“네...”
“시간 더 필요한가요?”
“아뇨.. 시작해요~”
이제부터 화가로서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작업실 중앙에 커튼을 열어젖히자
언제나 그렇듯 하얀 옷을 입은 매트리스와 베개가 놓여진 감춰진 공간이 드러났다. 물론 나
의 침실이 아닌 오로지 작품 활동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준비되면 나오세요~”
천장에 달린 조명기구를 만지작거리며 조명을 조절했다. 사실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난 뒤
맞추는 것이지만 오로지 보여지기 위함이었다.
구석의 탈의실에 들어간 정은이 옷을 벗는 동안 신기한 눈초리로 나의 행동과 그려질 공간
에 눈을 맞춘 예진은 흥미로워 하고 있는 눈치였다.
전신 타올로 몸을 가린 정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정면에 있는 내겐 알몸이 보이지 않
았지만 예진의 시선에선 정은의 옆라인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었다.
놀랐는지 잠시 딴청을 피우던 예진은 점점 나와 정은의 자유로운 모습에 넋을 잃어갔다.
타올을 거두고 매트리스위로 오른 정은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
기 시작했다.
마치 자위를 하는 모습,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오른손은 은밀한 부분에 그리고 왼손은 자
신의 왼쪽 가슴을 주무르는 포즈를 취했다. 누가 봐도 가장 민망하고 충격적인 포즈 그 자
체였다.
“정은씨~ 고개를 반대로 해봐요... 그렇죠.... 그리고 왼쪽 다리는 굽히지 말고 곧게... 아니..
그렇게 말고.... 아니...“
어차피 그릴 마음도 없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정은의 모습은 아마도 완성을 하지 못할 것이
었다. 순전히 예진과 같은 작업의 올가미에 걸려든 여자를 위해 쓰여질 미끼일 뿐이었다.
포즈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정은에게 다가가 은근한 스킨십까지 하며 포즈를 잡아
주고 다시 캔버스 앞으로 와 붓을 잡았다.
“힘들면 얘기해요...”
그림 작업은 시작되었다.
남자로서 흥분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만약 정은을 모델로 그림을 팔았더라면 그 작품은 고
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의 주 고객층은 나이가 비교적 많은 중년이
상의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진실 된 그림이 아니면 그들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정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예진은 종전에는 보지 못한 진지한 분위기에 휩싸여 숨소
리마저 죽여 내는 듯했다. 빨개졌던 얼굴도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는지 다시 희게 돌아와 전
보다는 평온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다 됐다... 이제 다시 한 번 제의만 하면 돼...’
쾌재의 기쁨이 벌써부터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샴페인을 먼저 터트리기엔 아직까
지는 이른 시점이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빠른 시일내로 섭외를 끝내야만 했다.
지루하리만큼 시간이 흘러갔다. 정작 작업을 진짜로 시작할 땐 시간가는 줄 몰랐던 나이지
만 거짓된 그림을 그리려니 좀도 쑤시고 시간은 시간대로 가지 않았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은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저기... 오빠!”
예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일부러 못들은 척을 해야 했다. 그만큼 작업에 몰두를
하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 위함이었다.
“진원 오빠~ 오빠~”
“어? 어.....”
살짝 놀라는 척 예진을 바라봤다. 어느새 멀지않은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물론 그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모른 척을 해야만 했다.
“오빠 저 갈께요...”
“그럴래? 또 놀러 올꺼야? 미안 오늘 작업 스케줄을 깜빡해서... 얘기도 별로 못 나눴네?”
“괜찮아요... 사기꾼 아니란 거 알았으니까요...헤헤~ 또 놀러 올께요”
“언제? 내일 점심시간에 와.. 나 매일 점심 혼자 먹는데... 내가 짱깨 쏠게”
“내일요? 우리 간호사 언니 혼자 드실텐데...”
“그럼 같이 와~”
“헤헤... 알았어요! 내일 봐요 오빠!”
예진이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다리를 오므린 정은은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
기 시작했다. 아무리 서로의 알몸을 본 사이라지만 창피했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정은은 오른쪽 골반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조금은 절뚝대
는 걸음으로 탈의실을 나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다.
“누나~ 고마워... 내가 작업 끝나면 맛있는 거 살게”
“야! 맛있는거고 뭐고 다음부턴 우리 포즈 좀 바꾸자... 아놔~ 다 늙어서 포즈 취하려니 골
반에 마비온다 야~“
“하하하... 그래 그럼~ 담에 누워 있자!!”
“그나저나 예진이 쟤 완전 넘어왔는데? 걱정할 필요 없겠다!”
나와 마찬가지로 섭외의 달인인 정은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 더는 말을 하지 않을 정도
였다.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요 시간낭비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누나 밥 먹었어?”
“아니... 아직! 너는?”
좋은 기분으로 나와 정은은 대충 정리를 해두고 작업실을 빠져나가 식당으로 향했다. 언제
나 고마운 선배였다. 작업에 관한한 두 말 없이 달려와 도움을 주는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해 준 고마운 선배이자 친누나와 같은 존재였다.
우중충한 날씨, 잿빛 하늘이며 곧 쏟아내릴 것 같은 빗물을 가득 머금은 검은 구름이 하늘
에 힘겹게 떠있다. 막히는 도로와 여기저기 귀를 괴롭히는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나는 미간
을 찌푸리지만 그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알 리가 없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
지...
나는 건물마다 한 두 개씩 널려있는 병원을 찾아 오늘도 그 앞을 서성인다.
‘아~ 저 여잔 키가 너무 작아~... 그 옆은 너무 늙었어!’
대부분 개인병원엔 두 명 내지 세 명의 간호사들이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그
이미지의 여자는 여전히 찾질 못하고 있었다.
‘씨발... 아무나 작업해버려? 좆도......’
지금껏 2개구를 이잡듯 뒤졌다. 하지만 내가 찾는 여자는 없었다. 아니, 고객이 찾는 여자는
없었다. 고객과의 약속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가 가장 힘겨울 때이다.
사실 두 명의 여자를 찾긴 했었다.
그러나 그저 겉모습일 뿐 속 내용은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것이 되질 못했다.
내가 작업을 하는데에 있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거짓이나 눈
속임은 나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했다.
내가 작업을 해서 먹고 살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방금 전 돛대를 피워내고 남은 것은 낡은
라이터뿐이었다.
“던힐 라이트 한 갑이요”
바로 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는데 종업원이 내가 찾는 여자의 외관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직업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에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아깝다는 생각뿐이다.
‘젠장 찾으려고 하면 안 나타나고... 오늘도 허탕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편의점 앞의 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을 쏟아낸다.
여전히 체증을 겪고 있는 강남의 거리는 나의 마음과도 같았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벌써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화가님이 젊으시네요?”
고객은 40대로 보이는 중년남성이었다. 앞머리부터 정수리까지 빛나고 있는 머리와 좋은 풍
채를 봐서는 중견기업이상의 간부급이거나 경영자로 보였다.
“젊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도 될 지...”
언제나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젊은 외모 때문인지 나이를 묻곤 했다.
“하하하... 원래 그림쟁이나 예술가한테 나이를 묻는 건 실례입니다.”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올 해 서른셋 됩니다”
“하하하... 젊은 혈기에 좋은 일 하십니다! 하하하”
다소 건방지다고 생각할 만한 대답을 고객은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사실 나 같으면 어린놈이 꼴값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이런저런 얘기를 섞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불편한 만남을 어서 끝내고 자리
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신의 성관념에 대해 이해를 시키려
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에 있는 고객도 다르지 않았다.
“뭐.. 내가 꼭 이런 걸 좋아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고객님! 저는 저의 고객님들의 성적 취향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
고 저로 인해 성적이건 마음의 안정이건 고객님들의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
족합니다. 그러니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주저리 말이 길어 길 것 같은 고객의 말을 잘라 맺음을 지어 주었다.
“젊은 친구가 호탕하기까지 하구만...”
“걱정 마십시오. 저는 물론이고 고객님께서도 지금의 작품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해주셔야 하
거든요... 판권자체에 대한 소유권도 물론 고객님 것이 되니 그림에 관한 것은 걱정하실 필
요는 없습니다.“
고객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오면서 자신의 변태스러움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는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오?”
“음... 최대한 고객님께 맞춰드립니다. 외모, 직업, 때에 따라서는 원하시는 분을 꼬집어 말
씀하셔도 작업가능하고요... 단 모델에 대한 포즈나 표정,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결정되
어야 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구도로 갑니다.“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나의 뜻을 밝혔다. 화가라는 자존심을 최소한 지켜내기 위함이
었다. 간혹 포즈나 표정까지 요구를 하는 고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긍을 했고 앞에 앉은
중년남성도 기꺼이 수락했다.
“간호사로 해주시오! 청순하면서도 섹시미를 가지고 있는 미인형에 C컵정도 되는 무식하지
않은 풍만한 가슴이면 좋겠고 엉덩이가 좀 컸으면 하오. 피부는 좀 흰 편이면 좋겠고...“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작업을 하기가 좀 힘듭니다. 물론 불가능
한건 아니지만요... 고객님 이메일 주소 하나만 적어주십시오... 모델 찾으면 사진을 찍어 보
내드리고 오케이 하시면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그가 말한 여성상은 너무도 추상적이었다. 그저 글래머에 피부가 흰 예쁜 간호사라고 말하
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예쁜데다 가슴까지 큰, 그것도 간호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 착수금은...”
“모델료, 계약금, 활동비까지 해서 500만원 주시고 작업 완료후에 잔금 치러주시면 됩니다”
“음...”
“비싸다고 생각 드십니까?”
“뭐.. 비싸다기보다는...”
“사실, 그런 야한 그림.. 더 싼 값에 사실수도 있죠... 하지만 고객님에겐 생명력이 없는 그
림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천 만원이 훌적 넘는 돈이면...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음... 그런가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서 보겠습니다. 저의 작품을 그렇게 싸구려 취급하시
는 분과는 더 이상 작품에 관해 얘기를 하고 싶지 않네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기분이 나빴다. 간혹 그림 값에 대해 흥정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엔 모델료며 나의 생각을 줄줄이 늘어놓고 이해해주길 바랐지만 그럴 때 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씨발놈.. 차라리 안 그리고 만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화가도 아니었지만 내 그림을 놓고 흥정을 할 정도로 배가 고프진 않았
고 그 정도로 예술가의 혼이 썩어 빠지진 않았다.
남들은 나를 보고 돈을 밝히는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나름대로 예술혼을 그 그림들에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미안하오~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 진심으로 사과 하겠소”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번 계약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기분 나쁜 것 이해하오... 그러니 재고를 부탁하오.”
중년남성은 나의 손을 붙잡으며 사과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사과가 나의 기분을 더욱 나쁘
게 만들었다.
“제가 일개 포르노물을 그리는 사람으로 보이셨나보군요. 그리고 제가 그린 그림을 그저 그
런 그림으로 보신거구요...“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무식한 놈의 실수를 한 번 봐주오~”
대부분 욕을 하며 나를 무시했다. 야한 그림이나 그리는 주제에 콧대가 세다며...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진심으로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었고 나는 다시 엉덩이를 소파에 붙였다.
“그럼 여자 분의 성기는 가려드릴까요? 아니면....”
“그건 화백님께서 원하는대로 하시오~”
“그러지요... 그럼 어쩔 수 없지만 나중을 위해 계약서를 쓰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문득 잠시 쉬는 사이 고객과의 계약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델을 구하는 일이
이토록 힘겨울 줄은 몰랐었다.
담배꽁초를 튕겨내고 다시 한숨을 크게 내뿜었다. 대부분 한 달 정도 걸리는 작업이 3주동
안 모델도 찾지 못하고 있음에 나조차도 조급함이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일어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가로 보이는 많은 병원들이 보였지만 선뜻 감이 오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시일이 다가옴
에 따라 나는 다시 발품을 팔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헛걸음의 연속이었다. 얼굴이 괜찮다 싶으면 가슴이 작고 가슴이 크다 싶으면 얼굴
이 죽사발이었다. 그런대로 얼굴과 몸매가 된다 싶으면 나이가 많아 보이거나 몸의 비율이
맞지 않아 작품성이 뒤떨어질 만한 여자들뿐이었다.
‘아~ 대한민국 간호사의 퀄리티가 이리도 떨어졌었나?’
터져 나오는 한숨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미 어둠의 그늘이 온 세상을 덮고 병원들
의 실내등이 꺼져나갔다.
성형외과라 해서 간호사들이 예쁘진 않았고 치과라 해서 웃는 모습이 아름답지는 않았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다시 옮겨 집으로 향하는 동안도 나의 아쉬움은 계속 이어졌다.
다시 해가 밝고 다음날이 되어 다시 집을 나섰다.
집이자 작업실... 형광등의 불을 내리면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 가득한 그 곳을 등
지고 다시 간호사를 찾아 나섰다.
‘강남이라고 뭐 볼 것도 없었어... 씨발 오늘은 어디로 가나~’
캔커피 하나를 들고 담배를 피워내고 있을 때였다.
출렁출렁...
나의 눈에 띈 거대한 두 개의 덩어리를 덜렁이며 어딘가 바쁘게 뛰어가는 백의의 천사.
갈색의 웨이브진 머릿결과 흰 피부, 잘록하진 않지만 두껍지 않은 허릿통 아래 큼지막하게
위치한 탱탱한 엉덩이.. 이미 그 것 만으로도 눈을 동그랗게 만들어 주기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목에 걸려있는 카메라로 그녀를 찍기 시작했다.
셔터소리와 함께 메모리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그녀,
165cm 정도의 적당한 키와 섹시미가 풍기는 날렵한 눈매, 도톰한 입술이 인상적인 간호사
는 삼각 김밥을 사들고 다시 길 건너편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이미 신호가 바뀌어 그녀를 놓칠 뻔 했지만 길 반대편에 위치한 ‘박소아과’로 들어가는 흔
적을 잡아낸 나는 바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동네 소아과에 저런 천사가 있을 줄이야~’
한동네에 살면서도 한 번 정도는 마주칠 법한데 처음 보는 여자였다.
바로 메모리에 담긴 사진들을 추려 이메일을 보낸 후 전화통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며칠전
부터 작업현황에 대해 의심을 품던 ‘황 이사‘였다.
[네.. 황중보입니다]
[황 이사님? 저 이 화백입니다.]
[어..어.. 이 화백님.. 어떻게 좋은 소식 좀 있는 건가요?]
나의 존재를 밝히자마자 물어오는 것은 모델의 선택 유무였다.
[예.. 아마 마음에 드실 것 같습니다.. 메일 확인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호탕하게 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은 황 이사는 10여분 정도 지난 후 바로 연락을 해 왔다.
목소리부터가 잔뜩 기대에 부푼 목소리였다.
[이 화백님...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그 여성분 100% 섭외는 가능한가요?]
[노력 해봐야죠.. 지금까지 성공률은 70%정도 됩니다.]
[부탁 좀 하겠소... 오늘 밤부터 그 여자가 꿈에서도 나올 것 같구려~ 허허허]
[그럼.. 또 연락드리죠~]
가장 힘든 모델 섭외가 남아있었다.
이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다.
고객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모델선별부터, 모델의 섭외.. 그 후에도 알몸을 드러내게 해야
했다. 더구나 성기의 노출은 왠만한 노력이 아니고선 성공확률이 높지 않을 정도였다.
‘자~ 이제... 먼저 만나서 나를 알려야지....’
일의 성공여부는 솔직함이었다. 괜히 돈으로 사람을 유혹하거나 속이려들면 내가 가늠한 것
보다 훨씬 단단한 벽이 쳐지기 마련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의, 아니 수많은 실패를
통해 깨달은 진리였다.
누구나 편견이 있듯이 소아과에 근무를 하는 것 자체부터 나를 겁먹게 만들었다. 소아과라
는 어감이 주는 이미지는 그녀마저 맑고 순수한 여자로 착각하게 만들은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직업과는 별개로 성적인, 게다가 캔버스의 한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여자의 마
음을 잘 이용해야했다.
거칠게 길었던 수염까지 말끔하게 깎아내고 잘 바르지도 않는 젤까지 쳐바른 뒤 최대한 깔
끔한 복장을 하고 그녀가 있는 ‘박 소아과’의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섭외작업을 할 때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기 때문에 심호흡을 몇 차례나 한 뒤
나를 추슬렀다.
운이 좋게도 어제까지 흐리던 날씨가 화창하게 개어있어 나를 돕는 듯 했다. 날씨도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어서오세요~”
웃으며 반겨줄 것 같던 백의의 천사는 어디론가 숨어있었고 애가 둘 정도 딸린 것 같은 중
년으로 보이는 간호사가 나와 눈을 맞추려 애를 쓰고 있었다.
‘아놔.... 이름이라도 알아내고 오는건데....’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허둥대던 나는 주사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고 하얀 피부에 엷은 피부막을 자랑하는 그녀의 육중한 가슴
으로 새와 같이 높은 시력을 자랑하는 눈동자를 맞췄다.
‘주.예.진’
얼굴과 이미지에 잘 맞는 예쁜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저기...”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는 순간 수간호사로 보이는 중년의 간호사가 손바닥을 내보
이며 말을 가로막았다.
“저희 지금 업무중이라... 대출 받을 사람 없거든요!”
황당했다. 기껏 멋을 내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것이 대출영업인으로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
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물론 앞에 서있는 중년 간호사는 싸그리
무시한 채 예진에게 말을 건넸다.
“저.. 예진씨? 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명함을 건네자 중년의 간호사는 화가라는 말에 자신의 말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자리
를 피해 주었고 아이처럼 놀란 표정으로 명함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림으로, 나의 작품안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의 미모와 몸매였다.
“그런데.. 어쩐일로....”
“말씀드리기가 좀 쑥스럽긴 하지만 며칠 전부터 예진씨를 봐 왔습니다. 우연찮게 뵌 분이지
만 사실 가지고 계신 이미지가 너무 청순하고 맑아 제 그림 속에 담고 싶어 이렇게 찾아 왔
습니다.“
며칠 전이라는 말만 거짓일 뿐 마음의 진심을 전하려 노력했지만 탐탁찮은 반응이었다. 그
러나 돈을 떠나 꼭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기에 물러설 수는 없었
다.
“저를 그리고 싶으시다구요?”
“네... 진심입니다.”
“에이... 농담이시죠? 저 같은 게 어떻게 화가님의 그림에...”
“저 같은 게 라뇨? 저 아닌 누구라도 예진씨를 보면 그리고 싶어 할 겁니다.”
“정말이세요? 농담이시죠?”
“정말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장난스레 웃음을 머금는 예진이었다. 누구나 비슷한 반
응을 보인다. 여자라면... 지금 그녀도 다른 여느 여자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요즘 이런 식으로 사기 치시는 분들 많다던데....”
역시 자주 들었던 질문이었다. 이것을 설명하고 나면 혹시 누드가 아니냐고 물어올 것은 자
명한 일이었다.
“사기라뇨... 경찰 손 붙잡고 오시거나 다른 분들과 같이 오셔도 됩니다. 아니면 화가협회에
전화 하셔서 저를 확인해 보셔도 되구요~“
주민증을 꺼내 보여주며 재차 확인을 시켜주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린 예진은
손사레를 쳐댔다. 오버스럽긴 하지만 나에 대한 신뢰를 쌓아주기엔 보다 완벽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럼.. 무슨 그림인데요? 혹시 누드 같은 거 그리시는 거 아니예요?”
보통여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내 계획과 예상 질문들이 나온다는 것은 성공률 90%이상이
라는 결과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왜요? 누드 같은 거 모델 돼보고 싶으세요? 하하하”
이미 ‘누드 같은 거’ 라는 말의 의미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이미 눈치 챘지만 그녀의 마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어머! 농담이시죠? 누가 그런 걸 하겠어요~”
관심은 있다. 하지만 누드는 안 된다 라는 결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대화가 오간다는 것은 뜻만 맞으면 하겠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누드는 그것에 대한 지식
이 부족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부정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여성들 모두 그러했다. 하지만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는 법!! 끝까지 긴
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미 결론은 누드가 아니라면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오늘 몇 시에 끝나시나요? 별 일 없으시면 혼자도 좋고 친구와 같이
오셔도 좋고 제 작업실 한 번 들러 주시면 좋겠는데요....“
특별한 대답 없이 명함을 바라보는 예진이었다. 분명 작업실의 주소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머.. 이 동네시네요?”
“네~ 길 건너 5분정도 걸립니다.”
“저기... 죄송한데 저는... 그냥 안할래요....”
“아! 그러세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조금 아쉽긴 하네요...”
“죄송해요... 그냥 용기가 안 생겨서....”
예진은 하기 싫다기 보다 주위의 이목과 자신감 결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
구보다도 꼬시기 쉬운 타입. 분명 남자친구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시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안하셔도 되니 제 작업실 한 번 들러주시죠. 제
그림도 오셔서 좀 봐 주시고 화가 친구 한 명 사겨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저도 간
호사 친구 한 명 얻고요~ 꼭 오실꺼죠?“
“네..네~ 한 번 들를께요~”
“혹시나.. 겁나시면 남자친구분이랑 같이 한 번 오세요... 선물로 캐리커쳐 하나 해드리죠~”
“네.. 남자친구 생기면 꼭 해주셔야 해요~”
“언제든 오세요... 제 작업실은 항상 만인에게 열려 있으니까요~ 그럼 수고 하세요”
나는 밀려들어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장담하진 못하겠지만 며칠내로 그녀에게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대로 빗나갔고 연락은 오지 않았다.
초조하진 않았다. 그저 작업의 시일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는 것이 조급할 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전화 한 통이면 미룰수도 있었지만 약속이 미뤄진다는 것 자체를 내가 용납할 수 없
었다. 무엇보다도 예진을 작업실로 데리고 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작업이야 며칠이면 끝낼
수 있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이번엔 우연을 가장 해야겠군!’
화구박스와 커다란 캔버스를 챙겨들고 그녀의 퇴근 시간을 맞춰 숨어야만 했다. 꼭 그녀를
그려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닌 그녀의 맑은 미소를...
주위를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도 어쩔 수 없었다. 예진을 꼬시기 위
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어둠이 져가며 중년의 간호사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고 바로 뒤를 이어 예진이 문
을 잠그고 있었다. 예진과 중년 간호사가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미리 알아둔 것이 일치했
다. 예진은 내가 숨은 방향으로, 중년 간호사는 반대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짐들을 챙겨들고 낑낑거리며 힘겨운 척을 하며 점점 그녀에게 다가서다 화구박스를 바
닥에 내려놓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척을 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걷던 예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도 나를 대번에 알아차
렸는지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황당함이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 보였다.
“어? 예진씨!”
“어?”
어느새 인도의 구석진 곳에서 마주친 예진과 나는 서로 웃는 얼굴을 보내주고 있었다. 예진
은 화가라는 말이 그제서야 몸에 와 닿는지 각종 화구들을 보고 웃음을 지어냈다.
“이제 퇴근 하세요?”
“아..네~ 그림 그리러 다녀오시나 봐요?”
“네~ 바닷가 갔다가 오는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모른 척 스쳐 지나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금세 달아났다. 다행히 나를 알아보고 게다가
뜻밖에 반가움으로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혹시 저 없는 동안 다녀가신 건 아니죠?”
모르는 척 한 번 들르라는 청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헤헤 갔었는데...”
“아!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장난을 치려는 건지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예진은 곧 진실을 털어놨다.
“사실은 못 갔어요...”
“하하하... 낚였군요... 저기.. 예진씨 나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네? 부탁이요?”
“지금 짐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이것 하나만 들어다 줄래요? 작업실 가서 맛있는 커피 대
접 할게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예진이었다. 두 번째 스친 인연이지만 여자로서 냉큼 따라나서기가 쉽
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여자일수록 더욱 몰아 세우
고 적극적으로 나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진은 수락도 거절도 못한 채 난감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나요? 미안합니다.”
작업실로 데려가기만 한다면 예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림이며 언
제나 지원을 해주는 선배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진은 얼굴은 긍정을 표하
면서도 언제나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낑낑대는 척 화구와 캔버스를 짊어지고 자세를 잡았다.
“그럼, 다음에 꼭 한 번 오세요~”
인사를 하고 예진을 스쳐 지나는 순간 왼손에 들린 화구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
팽개치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싶었지만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예진씨... 그건 무거워요... 이거 이젤만 좀 들어 주세요~”
“괘.. 괜찮은....”
물감이 가득 든 화구박스를 뺐어들고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가벼운 이젤을 넘겼다. 나 혼
자도 충분히 들 수 있는 것이라 괜히 무거운 것을 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진씨는 생긴 것도 예쁘신데 마음도 예쁘시네요.. 저 같으면 아마 안 들어 줬을 것 같은
데”
“저도 안 들어주려다 들어드리는 거예요..”
“하하하하... 고마워요~ 아주 고마워 죽겠습니다!! 예진씨는 집이 어디예요?”
“바로 옆동네에요~ 마을버스타면 10분 정도 걸리나?”
“아~ 가깝네요...”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쓸데없는 말들 중 공통점이나 연결된 고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녀와 가까워 질만한 단서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건 뭐... 이대로 가다간 여자 꼬시는 선수 되겠네....’
물론 선배나 후배, 또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모델을 건져와도 되기는 했지만 작품으로 그려
낼 때 내가 고생한 것이 훨씬 생명력이 넘치게 그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에 저는 작업 거는 건 줄 알았어요~ 후훗!”
“작업이요? 하하하...”
“근데 정말 저를 그리고 싶으신 거 였어요?”
“음.... 작품 끝내놓고 작업 걸려고 했는데요?”
“재밌으시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화백님? 화가님? 아니면... 편하게 오빠?”
“오빠가 좋은데요? 친근감 있고... 사실 여동생이 없어서 가진 놈들이 부러웠는데...”
“오빠? 진원오빠? 성함이 이진원 맞죠?”
“듣기 좋은데요? 오빠.... 흐흐흐”
“웃음소리... 어흐~ 변태같애...”
쓸데없는 말에 이어 점점 경계가 풀리기 시작했는지 예진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
게 느껴졌다. 단 두 번 만에 오빠라는 말을 쓰는 여자에게 누드모델을 대놓고 요구할 수는
없었지만 곧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다.
/철컹!/
반지하 특유의 냄새와 유화물감의 냄새가 섞여 코를 찔러왔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냄새가 풍기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실내등을 켜자 미리 청소를 해둔 작업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곳곳에는 헐벗은 여자들의 누
드화가 걸려있거나 세워져 있고 그것들과 같이 풍경화며 초상화까지 각양각색의 그림들이
제 위치에 자릴 잡고 있었다.
“고마워요~ 저기 소파에 잠시만 앉아 계세요 금방 커피 드릴께요~”
“작업실이라더니 의외로 깔끔하네요? 그림 좀 봐도 돼죠?”
“그럼요... 훔쳐가는 건 안돼요~”
커튼으로 가려진 주방 겸 다용도실로 들어가자마자 커피 물을 올리고 서둘러 선배에게 전화
를 걸었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가 예진과의 소통을 단절시켰다.
[여보세요? 그래 진원아~]
[선배! 나 좀 도와줘]
[무슨 소리야? 아~ 너 또 작업중이구나?]
[어... 돈 좀 어느 정도 뽑아오고 누나는 누드모델... 알지?]
[그럼.. 한 두 번 해보니? 그나저나 선배든 누나든 둘 중 하나로 불러!]
[알았어~ 빨리 와~]
대학 2년 선배인 정은은 항상 나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작업의 도우미였다. 이미 나도 정은
도 서로의 누드를 그린 친하고 가까운 사이였기에 껄끄러울 것은 없었다.
끓는 물을 따라 커피를 들고 나서자 그림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예진은 종종걸음으로
소파로 다가와 사뿐히 내려않았다.
그리고 건넨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는 커피잔이 풍기는 따뜻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림이 굉장히 많네요?”
“많긴요... 그냥 심심할 때마다 그린 건데요~”
“누드도 그려요?”
“네! 간간히 그려요~ 대부분 여자분들이 소문 듣고 찾아와서 그려달라고 해서 그리는 거지
만요...하하하“
“여자가 먼저 찾아 온다구요?”
“네!... 물론 모델을 따로 부르기도 하지만요”
“아~~~”
예진 역시 다른 그림들 보다 누드로 가는 눈길이 잦았다. 그저 젖가슴만 내민 그림부터 성
기까지 세세하게 묘사된 누드들도 많았기 때문인지 예진은 홍조를 띄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나체를 그려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였을 것이었다.
“오빠! 오빠도 전시회 같은 거 해요?”
“음.. 예전엔 했는데 요즘은 잘 안 해요. 마음에 드는 그림도 없고 모델도 없고....”
“아~ 그렇구나...”
“마음에 드는 그림 있어요?”
“네?”
실제로 보니 화가라는 것을 의심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계속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예진
은 나의 물음에 다시 소파에서 일어서 한쪽 구석으로 발길을 옮겨갔다.
그리고는 한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림을 집어 들었다. 반라에 상반신만 그려진 그림
으로 애절한 눈빛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요?”
“네... 그냥 굉장히 슬퍼 보여요...”
“혹시 행복한 눈물이라는 작품 알아요?”
“그럼요~ 디게 유명한 작품이잖아요~”
“사실 그거보고 따라 그려 본 거예요... 상상으로 그린건데 한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
각하며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기전의 모습을 그렸죠... 그러니 그건 행복한 눈물과는 정반
대인 치욕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 일종의 패러디 작품이네요?”
“뭐 그런 셈이죠.. 마음에 들면 가져가세요...”
“저...정말요?”
“네... 나중에 저 유명해지면 또 알아요? 행복한 눈물만큼 비싼 그림이 될 지...”
“그때 다시 돌려 달라기 없어요!!”
어줍짢은 그림선물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사실 내가 유명해진다면 성인누
드화로 유명세를 얻을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선물한 그림도 한 축을 이뤄 낼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썩어빠진 예술혼으로 유명해지기는 커녕 도태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만큼 이미 내 자신은 내 스스로도 많이 타락해 있었다.
“예진씨!”
“그냥 말 편하게 하세요... 거리감 있게 느껴지잖아요...”
“그..그래도...”
“오빠가 먼저 말 놓으면 저도 차차 편해질 것 같아요”
“그..그럼 그렇게 할까?”
“그렇다고 바로 놓는다...헤헤”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목표치에 어느 정도 다다라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진의 성격상 지지부진한 힘겨루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예진아~ 혹시 내 작품에 주인공이 되어 달란 말... 생각해봤어?”
“진짜 날 그리려고요?”
“난 맘에 없는 소리 안 해...”
“어떤 그림인데요? 혹시 누드?”
언젠가는 밝혀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여자와는 틀렸다.
나조차도 예진에게 누드모델을 쉽게 논하지 못 할 만큼 그녀의 몸은 옷 위로도 야하고 섹
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런 생각에서 이미 난 예술인임을 포기한 모습 그
대로였다. 나조차도 누드라는 것을 예술이라기 보단 외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진에게만큼은 말이다.
/똑! 똑!/
올 것이 들이닥쳤다. 정은의 등장일 것이었다.
나와 같이 예진도 작은 노크소리에 반응을 하며 출입문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두려움과 긴
장감이 흐르는 표정이었다.
“누구세요?”
정은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예진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문을 열어 정은을 맞이했다.
“어? 정은씨~ 어서와요~”
“안녕하셨어요? 어? 손님이 계시네?”
“괜찮아요.. 어서 들어와요~”
언제나 그렇듯 화가보다는 연기자가 어울릴 만큼의 연기력을 선보이는 선배였다.
은근슬쩍 예진의 눈을 피해 뒷주머니에 하얀 봉투를 꽂아 넣어준 그녀는 당당하게 소파로
발길을 돌렸다.
수수한 남방셔츠에 짙지 않은 화장의 수수한 얼굴, 청바지를 받쳐 입은 정은의 모습은 수수
한 일반 여자와 같았다.
“어머? 화가님! 저기 예쁜 분도 모델이예요?”
“하하하... 모델 좀 해달라고 해도 안 해주네... 그냥 친구예요, 예진씨! 이쪽은 정은씨...”
천연덕스레 둘을 소개 시켜주고 나는 커텐 안으로 몸을 피했다.
정은을 부른 것은 같은 여자로서 누드에 대한 선입견을 깨주기 위한 작업이 진행이 될 것이
었다.
대충 들은 말로는 누드라는 외설같은 예술의 순수함을 설명한다는데 남자인 나로서는 정은
의 말을 잘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분명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은 분명한 듯했다.
그저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여느때처럼 정은이 신기에 가까운 말빨을 통해 예진이 누드
라는 단어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만이라도 털어내길 빌 뿐이었다.
일부러 빨리 나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끈다면 우리 둘의 연기를 눈치
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모자르지도 남지도 않는 아주 적당한 시간
이....
이미 물은 팔팔 끓어 어느 정도 증발이 되어 한눈에 봐도 줄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약 6~7분정도의 텀.
나는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 들고는 커텐 밖으로 모습을 비췄다. 마술을 부려도 어찌 부렸는
지 예진의 맑은 눈망울이 정은의 눈에 고정되어 빠져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쓰!! 됐다!!’
내가 다가서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정은과 예진은 웃음을 머금기도 하고 볼에 손을 대
며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어머! 그럼 오늘 언니 그리시는 날 이예요?”
“어... 구경하고 갈래?”
언제부터인지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언니와 동생사이처럼 편안해 보이는 그녀들이었다. 이
미 물밑작업은 끝이 난 듯 보였다.
“그.. 그래도 돼요?”
“예진이 너 아직도 누드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못 버렸구나?”
“뭐.. 솔직히...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직접 보면 달라 질꺼야... 남아있는 생각도~ 바쁜 일 없으면 보고 가도 돼! 돼지 같은 몸매
지만 그림 속에 들어간 내 모습을 보면 너무 예쁘고 멋져 보이거든...“
“정말 그래요? 저도 어디선가 본 것 같긴 한데.. 인터뷰하는 거~”
여자들의 수다는 한 번 터진 봇물처럼 끝이 없었다.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약간의 한기가
느껴지는 작업실의 공기를 덥혀야만 했다. 곧 섭외의 정점에 다다를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
었다.
“어? 화백님 오신다!”
정은은 눈을 찡긋거리며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어냈고 전보다 밝아
진 예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은 앞에 커피를 놓아주고 리모컨을 들어 온풍기를 가동
시켰다.
“따뜻한 커피 좀 마시면서 몸 좀 풀어요... 곧 따뜻해질 꺼예요. 온풍기 틀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해내갔다.
벌써 몇 년째 거의 제자리인 정은의 알몸 스케치가 담긴, 그리고 부분부분 색이 입혀진 캔
버스를 이젤에 올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몸에 닭살 돋으면 퀄리티 떨어지니까 충분히 따뜻해지면 시작하죠”
“네.. 아! 화백님.. 예진이가 그리는 거 구경 좀 하고 싶다는데~ 그래도 되죠?”
시나리오에 맞게 정은은 작업을 지켜봐도 되는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다. 나는 일부러 담담
하면서도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정은씨만 괜찮으면... 저는 상관없어요”
역시 언제나 하던 말을 되풀이 해놓자 박수까지 치며 예진을 향해 말을 건네는 정은이었다.
“거 봐.. 된다고 했지? 구경하고가~”
대답대신 눈을 접으며 웃음을 지은 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정은이 등장하면서부터 순조롭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성사가 된다면 무엇보다 좋
을일이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또 얼마나 우려먹을지 겁부터 덜컥 났다.
“근데 화백님... 예진이 작품으로 하시면 정말 대작 나올 거 같은데.. 잘 좀 꼬셔봐요..”
언제쯤 나올까 하는 질문이 드디어 터져 나왔다. 분위기상 딱 지금이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괜히 눈을 지긋이 내려 깔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충실한 내공연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은씨! 꼬시다뇨!! 좋은 작품은 제 손에서 나오는 게 아니예요. 모델, 또는 사물.. 그려지
는 모든 것들의 진심어린 감정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고 말했잖아요!“
“죄...죄송합니다.”
“유독 정은씨의 그림이 좋은 작품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모두 정은씨의 마음 때문이었
던 것 잊었나요?“
순식간에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일부러 만든 냉랭한 분위기지만 예상보다 예진에게 잘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화가 난 척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커튼 안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이제 마지막으로 돈의 유혹을 던져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봉투에 액수까지 볼펜으로 적어준 정은의 정성에 다시 한 번 감동하는 나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동안 정은이 누드에 대한 깊은 매력과 철학을 마무리 하고 있을 것이고 이
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면 깨끗이 예진이란 모델은 포기를 해야 했다.
분명히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려지는 모델의 생명력이 그대로 작품
을 통해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내가 전문모델이나 돈을 주고 사는 모델을 그리지 않는 이유였다. 분명 그녀들이 훨
씬 능욕적이고 포즈의 자연스러움이 좋았지만 설레임과 풋풋함은 아마추어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닳고 닳은 여자보다 순수한 숫처녀를 좋아하는 남자의 본능을 일깨우기 가장 좋은 표정과
포즈가 그려지는 조건이 그것이었다.
나는 봉투를 손에 들고 다시 그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앉았었던 자리에 자리를 잡고
봉투를 정은을 향해 건넸다.
“정은씨 화내서 미안해요... 예진씨 놀랐지? 미안...”
“아.. 아니예요~”
적잖이 놀랐는지 예진은 바로 대답을 내놓는 반면 정은은 고개를 숙인채 미안함의 연기모드
를 보여내고 있었다.
“정은씨? 미안... 이거 저번 작품 모델료예요~ 200만원이니까 한 번 세어 봐요”
“저 모델료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전 그저 그려지는 것이 좋을 뿐인걸요~”
“정은씨의 그런 마음 때문에 작품이 잘 나오는 거예요... 그건 그거고 수고하신 것은 받으셔
야죠... 어서~“
“가.. 감사합니다.”
정은은 내민 봉투를 받아 바로 핸드백으로 감추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연기일 뿐이었
다.
“세어 보세요... 어차피 계약까지 했으니 확실한 게 좋잖아요... 어서요~”
정은은 현금과 수표가 잔뜩 섞인 돈 뭉치를 대충 세는 시늉을 했다.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예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작업은 끝이었다.
충분한 동기부여, 그에 따르는 합당한 댓가,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작품...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흔들리다 못해 이미 마음을 정한 것처럼 보이는 예진이었다. 자신의
한 달 월급보다 많을 돈이 마지막으로 갈팡질팡하던 그녀의 마음을 마구 흔들었을 것이다.
“기분 풀렸어요?”
“네...”
“시간 더 필요한가요?”
“아뇨.. 시작해요~”
이제부터 화가로서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작업실 중앙에 커튼을 열어젖히자
언제나 그렇듯 하얀 옷을 입은 매트리스와 베개가 놓여진 감춰진 공간이 드러났다. 물론 나
의 침실이 아닌 오로지 작품 활동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준비되면 나오세요~”
천장에 달린 조명기구를 만지작거리며 조명을 조절했다. 사실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난 뒤
맞추는 것이지만 오로지 보여지기 위함이었다.
구석의 탈의실에 들어간 정은이 옷을 벗는 동안 신기한 눈초리로 나의 행동과 그려질 공간
에 눈을 맞춘 예진은 흥미로워 하고 있는 눈치였다.
전신 타올로 몸을 가린 정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정면에 있는 내겐 알몸이 보이지 않
았지만 예진의 시선에선 정은의 옆라인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었다.
놀랐는지 잠시 딴청을 피우던 예진은 점점 나와 정은의 자유로운 모습에 넋을 잃어갔다.
타올을 거두고 매트리스위로 오른 정은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
기 시작했다.
마치 자위를 하는 모습,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오른손은 은밀한 부분에 그리고 왼손은 자
신의 왼쪽 가슴을 주무르는 포즈를 취했다. 누가 봐도 가장 민망하고 충격적인 포즈 그 자
체였다.
“정은씨~ 고개를 반대로 해봐요... 그렇죠.... 그리고 왼쪽 다리는 굽히지 말고 곧게... 아니..
그렇게 말고.... 아니...“
어차피 그릴 마음도 없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정은의 모습은 아마도 완성을 하지 못할 것이
었다. 순전히 예진과 같은 작업의 올가미에 걸려든 여자를 위해 쓰여질 미끼일 뿐이었다.
포즈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정은에게 다가가 은근한 스킨십까지 하며 포즈를 잡아
주고 다시 캔버스 앞으로 와 붓을 잡았다.
“힘들면 얘기해요...”
그림 작업은 시작되었다.
남자로서 흥분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만약 정은을 모델로 그림을 팔았더라면 그 작품은 고
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의 주 고객층은 나이가 비교적 많은 중년이
상의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진실 된 그림이 아니면 그들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정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예진은 종전에는 보지 못한 진지한 분위기에 휩싸여 숨소
리마저 죽여 내는 듯했다. 빨개졌던 얼굴도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는지 다시 희게 돌아와 전
보다는 평온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다 됐다... 이제 다시 한 번 제의만 하면 돼...’
쾌재의 기쁨이 벌써부터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샴페인을 먼저 터트리기엔 아직까
지는 이른 시점이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빠른 시일내로 섭외를 끝내야만 했다.
지루하리만큼 시간이 흘러갔다. 정작 작업을 진짜로 시작할 땐 시간가는 줄 몰랐던 나이지
만 거짓된 그림을 그리려니 좀도 쑤시고 시간은 시간대로 가지 않았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은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저기... 오빠!”
예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일부러 못들은 척을 해야 했다. 그만큼 작업에 몰두를
하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 위함이었다.
“진원 오빠~ 오빠~”
“어? 어.....”
살짝 놀라는 척 예진을 바라봤다. 어느새 멀지않은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물론 그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모른 척을 해야만 했다.
“오빠 저 갈께요...”
“그럴래? 또 놀러 올꺼야? 미안 오늘 작업 스케줄을 깜빡해서... 얘기도 별로 못 나눴네?”
“괜찮아요... 사기꾼 아니란 거 알았으니까요...헤헤~ 또 놀러 올께요”
“언제? 내일 점심시간에 와.. 나 매일 점심 혼자 먹는데... 내가 짱깨 쏠게”
“내일요? 우리 간호사 언니 혼자 드실텐데...”
“그럼 같이 와~”
“헤헤... 알았어요! 내일 봐요 오빠!”
예진이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다리를 오므린 정은은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
기 시작했다. 아무리 서로의 알몸을 본 사이라지만 창피했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정은은 오른쪽 골반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조금은 절뚝대
는 걸음으로 탈의실을 나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다.
“누나~ 고마워... 내가 작업 끝나면 맛있는 거 살게”
“야! 맛있는거고 뭐고 다음부턴 우리 포즈 좀 바꾸자... 아놔~ 다 늙어서 포즈 취하려니 골
반에 마비온다 야~“
“하하하... 그래 그럼~ 담에 누워 있자!!”
“그나저나 예진이 쟤 완전 넘어왔는데? 걱정할 필요 없겠다!”
나와 마찬가지로 섭외의 달인인 정은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 더는 말을 하지 않을 정도
였다.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요 시간낭비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누나 밥 먹었어?”
“아니... 아직! 너는?”
좋은 기분으로 나와 정은은 대충 정리를 해두고 작업실을 빠져나가 식당으로 향했다. 언제
나 고마운 선배였다. 작업에 관한한 두 말 없이 달려와 도움을 주는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해 준 고마운 선배이자 친누나와 같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