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클럽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2 16:37 조회 769회 댓글 0건본문
바닐라 클럽" 1장 5월 3일. 내 생일이며, 회사에 사표를 내던진 날이었다. 동시에 무료함에 지친 운명이 내 멱살을 와락 거머진 날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날 아침, 동료들보다 일찍 나와 실장의 책상에 사표 를 곱게 올려 놓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 동안 내내, 종종 꿈꾸 어 온대로 기세 좋게 실장의 얼굴에 사표를 던지지 못했나 후회하고 있었다. 실장 곽 재원. 곽 실장은 뉴욕에서 나고 자라 대학원까지 마친 후 워너 브러더스 사 광고담당으로 근무 하다 특채 된 케이스로 서른 둘에 기획실장 자리를 꿰어 차고 앉았다. 곽 실장은 미국 물을 먹었다면서 도 회사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곽 실장 앞에서는 사생활이 용납되지 않았다. 곽 실장은 명쾌한 논리와 화려한 화술로 직원들을 꼼짝 못하게도 했을 뿐 아니라 입을 다물고 있을 때도 슬슬 눈치를 보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곽 실장은 누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모와 탄탄한 아랫배와 쭉 빠진 다리를 가 진데다가 나보다 키가 컸다. 당신이라도 곽 실장 앞에 서면 주눅이 들 게 분명하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가던 걸음을 멈춰 화장실로 꺽어 들어갔다. 그냥 이대로 가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이 내 발길을 돌려 놓 았다. 나는 티 하나 없이 닦여진 거울 앞에 서서 노트북 가방을 매고 있는 나를 들여다 보았다. 거리에 서 만나는 그렇고 그런 넥타이 부대원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곽 실장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솔직히 나는 키가 작은 편이 아니다. 평균 이상이다. 곽 실장, 아니다. 사표를 던졌으니 곽 재원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페미 니스트들은 곽 재원이 여자기 때문에 내가 자격지심에서 사표를 내던졌다고 생 각할 가능성이 높다. 오해는 마라. 나는 성에 차별을 두지 않는 사람이다. 곽 재원 앞에만 서면 내가 쪼 그라든다는 느낌이 정말로 나를 미치게 하였 다. 곽 재원은 내가 꿈꾸어 온 완벽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 번도 완벽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간혹 있다. 곽 재원 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사무실로 또각또각 걸어와 턱을 약간 쳐든 채 나를 내리깔 듯 쳐다본 곽 재원의 출근 첫 날 이후로 곽 재원은 내 모든 스트레스 의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곽 재원을 비난할 뜻은 없다. 나만 특별히 못살게 군 적이 없음을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도 있다. 곽 재 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는 가시밭길을 걷듯 고통스러웠다. 몇 번이나 혼자 술을 마시면 서 곽 재원은 완벽하지 않다를 외쳐도 보았지만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곽 재원은 한 치의 실수 도 없었다. [곽 재원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에요. 알고보면 모두 거기서 거기라구요.] 아나이스가 그렇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곽 재원을 보면 그렇게 말 못할 걸요?]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려고 커피잔으로 손을 뻗던 내 눈에 아나이스의 대답이 들어왔다. [병이로군요.] 절로 콧방귀가 뀌어졌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에 자판을 두드렸다. [완벽주의자가 되겠다는 게 병이라면 세상에 병 아닌 게 어딨습니까?] [......] 아나이스는 마침표를 정확하게 여섯 개를 찍었다. 내가 막 자판 위에 얹어 두었던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데 아나이스가 글자를 보 내왔다. [그래서 결국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에서 나와 버렸단 말이네요. 처량한 최후네요.] 나는 무서운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다. [무슨 소립니까? 화장실 휴지통에 일회용 컵이 있더란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똥을 싸서 곽 재원의 책상 위에 턱 하니 올려 놓고 왔습니다.] 물론 내 말은 뻥이었다. 사실 나는 거울만 쳐다보다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동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 계단을 이용했다. [후후.] 아나이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후후라뇨?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게 중요한 사건인가요? 어쨌든 당신처럼 재미있는 사람 을 만나게 돼서 반갑네 요. 다음에 봐요.] 아나이스는 순식간에 대화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봄꽃들로 둘러싸인 종각이 보이는 사이버 카페 구석에 앉아 있던 나는 다시 외 톨이 신세가 되었다. 나는 아나이스에게 아무 것도 물어본 것이 없었다. 아나이 스의 질문에 대답만 했다. 왜 이런 시간에 통신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 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온 길이라 는 말을 꺼냈다가 그만 흥분해서 내 얘기만 하다 말았다. 그래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끊이지 않고 얘 기를 했는데... 인연이 없나보다, 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하루에 똑같은 사람을 그것도 우연히 피씨 통 신 대화방에서 만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나이스를 불러낼 작정으로 궁상을 떨었다. 내 가 있던 곳은 홍대 근처 사이버 카페였고, 날씨는 죽여줬다. [그럼 친구를 불러요. 시간도 많잖아요?] 그 말에 김이 팍 빠졌다. 그 말을 듣고 시계를 보니 4시 25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구 불러낼 만한 사 람이 있나 잠깐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시간 낭비만 하고 말았다. [이런 기분으로 만나봤자 술만 퍼마시게 될테고... 차라리 이렇게 얘기나 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안하네요. 전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나는 아나이스가 또 작별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질까봐 재빨리 손가락을 놀렸다. [여긴 자주 오세 요? 대화방 말입니다. 자주 못보던 아이디라서요.] 그 질문에 아마도 아나이스는 피식 웃었을 것이다. [여기 터줏대감이신가 보네요. 저는요,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인터 넷 할 것 없이 다 돌아 다녀요.] 아나이스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고 더 빨리 자판을 쳤다. [대단하시네요. 근데 누굴 찾으십니까?] [이제 호김심이 발동하는 모양이지요? 어떤 때는 호기심은 위험하기도 하죠. 농담이 아니에요. 사실 저 도 제가 찾는 사람을 아 직 몰라요.] 나는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도대체 아나이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죠? 전 어디에서나 아나이스에요.] [잠깐만요!] 그러나 나는 또 아나이스를 놓치고 말았다. 아나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화방을 빠져 나가 버렸다. 2장 정확하게 7시에 텔레비전이 켜졌다. 7시 뉴스 시그널이 내 고막을 찢을 듯 때렸다. [제기랄.]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리모콘을 찾았다. 밤 4시까지 채팅을 하다 잠들어 좀체 눈이 떠지질 않았 다. [이러다 지각하는 거 아냐.] 리모콘의 서늘한 느낌이 손 끝에 닿는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참, 사표를 냈지.] 나는 실없이 실실 웃으며 리모콘을 텔레비전 쪽으로 향했다. 전원 단추를 누르자 텔레비전은 텅하는 소 리를 낮게 내며 꺼졌다. 마치 서부의 총잡이처럼 리모콘 끝을 후 불고는 리모콘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잠? 머리가 뻐근하고 눈이 시렸지만 더 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언제든 마음 내킬 때 자면 되는데 무슨 잠이 오겠나. 나는 허물을 벗는 뱀처럼 아주 천천히 침대를 빠져 나와 컴퓨터로 가 전원 스위치를 꾹 눌렀다. 위잉 소리를 내며 글자들을 뱉 아내는 컴퓨터를 뒤로 하고 씽크 대로 갔다. 나는 서울 변두리 동네 중에서도 지대가 가장 높은 동네에 있는 원룸형 아파트에 살았다. 오르락내리락 하기가 힘들긴 하지만 내 돈으로 마련한 보금자리인데다가 공기도 맑고 창 가에 서면 관악산과 동네 전 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주전자 뚜껑이 호루라기 소리를 내서 얼른 달려갔다. 코 끝으로 풍겨 오는 구수한 커피향은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룬 후 회사 자 판기에서 빼 마시는 커피향과 비길 게 아니 었다. 머그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컴퓨터 앞에 가 앉았다. 마우스를 끌어당겨 전자 메일을 확인하려고 통신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천리안부터 하이텔, 나우누리까지 빙 둘러보는 이 일은 회사에 다닐 때도 출 근하자마자 하는 일이었다. 천리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다는 메시지가 나를 반겼 다. 지난 새벽에 대화방에서 만난 누군가에게서 온 편 지겠거니 생각하며 편지 읽기로 들어갔다. 아나이 스가 새벽 2시 경에 보낸 걸로 되어 있었다. [아나이스?] 내 머리를 의심하지는 마라. 나는 지난 새벽에만도 대화방에서 8명을 만났다. 낮에는 12명 정도를 만났 다. 혹은 더 많을지도 모 르겠다. 특히 천리안에서는 대화방에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아이디와 다른 별명을 쓰기 때문에 아이디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다음에 다시 만나도 별명을 바꾼다면 알아보기 힘들었다. 일단 아나이스와의 대화를 갈무리 해 둔 파일을 찾아 보았다. 나는 늘 기록을 남겨두기 위해 보통 대화를 시작할 때 갈무리를 시작하는데 나중에 상대의 아이디를 파일명으로 하여 내 자료실에 잘 정리해서 보관해 두었다. 다행히 anais.cap와 anais1.cap로 된 파일이 있었다. 누군지 희미하게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anais.cap를 화면에 띄워 한 줄을 읽고서야 확실히 누군지 알 수 있 었다. 왠지 모르게 야릇한 느낌을 주는 여자. 아나이스가 스스로 여자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말투나 느낌 으로 미루어 여자 행세하는 남 자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통신에서 갈고 닦은 내 직감과 경험이 틀렸다해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내게 온 편지는 무조건 읽어보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읽는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편지는 간단했다. [아나이스에요. 누굴 죽도록 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혹 누굴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답 장 주세요.]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했다. 아무리 통신을 통해 만났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황당한 편지를 보내도 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통신에서의 만남에도 예의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아나 이스는 처음 만났을 때도 안녕하세요라고 하지 않고, 지금 뭐하고 있어요라고 물어 봤다. 다음 번에는 뭐랬더라. 뭘 그렇게 헤매고 있어요, 뭐 이런 식이었다. 그건 좋다고 쳐도 헤어질 때 한 번도 제대로 인 사를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나이스의 편지를 저장해 둔 후에 입맛을 다시며 편지 쓰기로 들어갔다. 온 편 지에는 꼭 답장을 해 준다는 것도 내 원칙 이었다. 나도 간단하게 답장을 썼다. [그런 적 없음.] 이렇게 써 놓고 나는 혼자 쿡쿡 웃었다. 아나이스가 내 편지를 보면 얼마나 황당할까 싶어서였다. [다행이군요. 내가 찾던 사람이 가져야할 조건 중 하나는 가진 셈이니까요. 오늘 아침 아홉시에 대화방 에서 기다릴게요.] 인터넷에서 일간지들을 읽고 나와 아침을 달걀 후라이로 떼우고 하이텔과 나우누리를 둘러 천리안으로 돌아갔을 때, 아나이스의 짤막한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때가 8시 근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9시에 아나이스가 나타났다. 나는 대뜸 말했다. 아나이스는 재빨리 되물었다. [왜요? 제가 뭘 어째서요?] 왜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느냐, 당신 그렇게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냐 하고 따끔하 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너 무 째째한 것 같아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아무 얘기도 않고 갑자기 사라져서 그래요?] 나는 뜨끔했다. 그러나 내 손은 이미 움직인 후였다. [네.] [음...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이해하세요.] 말하고 싶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양미간을 찡그리 며 자판을 두드렸다. [사정이 있다니 어쩝니까? 할 수 없는 일지요.]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혹시 사랑은 해 본 적이 있어요?] 또 뜬금 없는 말이 화면 위에 튀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사랑 타령을 하는 걸로 봐서 고 등학생이거나 중학생일 듯도 한데 말하는 투로 봐서는 최소한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졸업한 것 같 았다. 성인이 확실하다면 실연을 당했든지 컴퓨터 섹스나 하러 다니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컴퓨터 섹스, 줄여 컴섹을 하 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나이스를 떠 보았다.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겁니까?] 아나이스는 내 반응에 온 신경을 세우고 있었는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어떤 거든 좋아요.] 사랑이라... 너무 광범위한 얘기였다. 내 뇌는 정신없이 사랑과 관련된 기억들을 찾아내느라 분주했다. 오래지 않아 뇌가 녹슨 기억 하나를 툭 던져 주었다. [대학 시절에 같은 과 여자 친구를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후엔 사랑하 는 여자가 없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자를 많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랑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채팅하는 게 부담도 적 고 여러 여자를 만날 수 있는데 굳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럼 섹스도 해 봤겠네요?] 아나이스가 본색이 슬슬 드러내는구나 싶었다. [컴섹도 과히 나쁘진 않지.] 내 숨이 천천히 가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물론 해 봤습니다. 그쪽은요?] 대답하기 곤란한지 아나이스는 좀 망설였다.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처지이긴 하지요. 결혼했거든요.] 아나이스의 대답에 온 몸이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유부녀는 처음이었다. 유부녀와 유부남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가 한동안 유행한 후로 유부녀의 성에 대해 농담삼아 얘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바로 내 앞에 유부녀가 나타날지는 몰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예.] 설마, 하는 생각으로 자판 위에 손을 내버려 두고 있는 나에게 아나이스가 말했다. [지금 컴퓨터 섹스같은 걸 하자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굳이 못할 이유도 없지만요. 하지만 때 가 아닌 거 같아요. 전 에 내가 말했죠. 난 사람을 찾는다구요. 정말이에요. 내게 꼭 맞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당신이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난 지금 무척 조심스럽거든요. 내게 좀 더 진지 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날 아침부터 점심까지 전화가 불이났다. 동료 상규는 열을 내면서 돌아오라고 부탁했으며, 다른 회사 몇곳에서도 전화가 왔었다. 그러나 곽재원이 있는한은 회사를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점심 때쯤 되 어서 곽 재원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곽 재원은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로 간단하게 그러나 위엄있게 말했다.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 본 다음에 내게 전화 해요.] 나는 잔뜩 얼은 채 곽 재원의 말을 들었다. 곽 재원이 전화를 끊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 았다. 아주 몹쓸 짓을 저지르다 선생님한테 들킨 학생처럼 바짝 긴장된 온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 다. 나는 결국 곽 재원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마른 침을 어렵게 꿀꺽 삼키고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걸 내 의지라고 해야 할까.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동작이 입 력된 로봇처럼 움직였다. 몇 번이나 얼굴을 씻고 손을 씻었다. 머리도 두 번을 감았다. [가끔은 있죠, 아주 예쁘게 차려 입고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가고 싶다는 상상을 해요. 거기엔 정 말 아무 것도 없어야 해 요. 사람도 별장도 요트까지도요. 꼭 뭔가가 있어야 한다면 새하얀 페인트로 칠 해진 나무 벤취가 좋겠어요. 유치하죠?] 나는 네라고 자판을 두드릴 뻔 했다. 아침에 아나이스와 약속한대로 13시에 대화방에서 만났다. 이 만남 이 끝나면 바로 회사로 가려고 옷을 다 차려 입고 있던 터라 아나이스의 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뇨.] 아나이스의 말들이 화면 위에 개미처럼 분주하게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아예 팔짱을 낀 채 그 말들 을 눈에 집어 넣고만 있 었다. [그 무인도에는 아주 높은 절벽이 있었으면 해요. 절벽에는 바다새들의 둥지가 있어서 바다새들이 아득 하게 내려다 보이는 파도 를 배경으로 힘차게 날아 다니는 풍경을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아까 말 한 벤취말인데요, 그게 절벽 끝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거에요. 가만히 벤취에 앉아서 석양이 지기를 기 다리고 있다가 수평선이 빨갛게 물들 때 일어나요.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조금씩 사라지다가 제 몸을 모 두 감출 때, 나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지요. 아마도 내 귀에는 바다새의 울음 소리와 파도 소리밖 에 들리지 않을 거에요. 참, 내 몸이 떨어지면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낼지도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쉬지도 않고 하나 싶었다. 아나이스가 잠깐 손을 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가 봐야 합니다. 그 뒷 얘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나이스는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타를 쳤다. [잔간만요. 얘기 거의 다 끝났어요.] [그럼 얼른 해 보십시오.] 나는 시선을 아나이스의 말이 뜰 부분으로 모았다. [내가 절벽에서 떨어질 때요, 내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기가 막혀 코로 푸푸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어느새 내 손은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깐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면서요?] [그랬죠. 쭉 없다가 나를 밀어줄 때 나타나면 되잖아요.] [그게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후후. 그러니까 상상이지요. 현실 속에서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뚜르르 자판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쪽이 찾고 있는 사람이 절벽에서 그쪽 등을 밀어줄 사람이란 말입니까? 데이빗 카퍼필드 같 은 마술사도 현실 속에 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을텐데요.] 아나이스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겠죠. 하지만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거나 뒤바뀔 수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게 되요. 이해하겠어 요?] [그러니까 좀 이해를 해 줘. 지금 내 형편이 그렇게 안된단 말이야.] ................. [회사 일은 다 정리된 모양이죠?] 아나이스를 다시 만난 건 저녁 무렵이었다. 물론 약속도 없었다. 대화방 대기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나이스가 나를 초대 했다. 낮에 만났을 때 아나이스는 사표낸 사람한테 뭐가 그렇게 급한 일이 있냐며 핀잔을 주었었다. 그 바람에 처리하지 않고 나온 회 사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한다고 둘러댔다. [아닙니다. 회사 가는 길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인연을 자를 땐 칼같이 냉정해야 한다, 뭐 이런 거였습 니다.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둬서야 되겠습니까?] 그날 가는길에 갑자기 칼이 갖구 싶었다. 물론 그 칼은 인연을 자르는데 쓰는 상징적인 칼이 아니라 날 이 시퍼렇게 선 진짜 칼을 말한다. 끝이 아주 날카롭고 길다란 칼. 맞다, 회칼 말이다. 그걸로 곽 재원 의 배를 푹 찔러 버리고 싶었다. 당신이 내 심정을 제대로 읽었다면 곽 재원이 싫어서라기 보다 무서워 서 찔러 버리고 싶었다는 뜻인 줄 눈치챘을 것이다. 더 이 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곽 재원을 이 세 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것, 그러나 내 공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래갈 필요 도 없었다. 내 칼에 맞은 곽 재원이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하다 곧 눈을 까뒤집으며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자주 대화방에 나타나시는 거 아닙니까? 결혼한 거 맞습니까?] 나는 벼르고 벼르던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실례였으나 아나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가정부가 있거든요. 집에서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지요.] 가정부? 내심 놀랐지만 태연하게 되물었다. [가정부까지 두신 분 취미 치고는 좀 어울리지 않는 거 아닙니까?] [뭐가요?] [채팅 말입니다.] [후후. 그렇지요? 내가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사람을 찾으려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또 그 사람 찾는다는 소리.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나도 모른다고 했을텐데요?] [그렇담 아직까지는 못 찾았다는 말이군요.] [예.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 머지 않아 찾게 되겠죠.] 나 역시 많은 여자를 통신에서 만나고 있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나이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음, 내 말에 속이 상한 모양이네... 그러지 마요.] 나는 흠찔했다. [무슨 오해를.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그랬습니다. 저도 통신에서 만나는 여자가 많은데요 뭘. 채팅이 이 래서 좋은 거 아닙니까? ] 아나이스는 빨리 움직였다. [별로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다른 여자들 만나지 마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고쳐 말하겠어요. 아주 기분 나쁘니 절대 다른 여자들 만나지 말아요. 알았죠?]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궁리하였다. 다른 여자들과 계속 접촉하겠다면 아나이스는 미련없이 떠나버릴 분위 기였다. 최근에는 아나이스처럼 지속적으로 연결된 여자가 없었다. 버리자니 아 깝고 그렇다고 붙잡기에는 조건이 만만치 않았다 . [대신 그쪽도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을 만나면 안 됩니다.] 정당한 거래니 아나이스가 받아들일 걸로 봤는데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건 곤란하네요. 내가 여러 남자를 만나는 건 내가 찾는 남자가 꼭 이 남자다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 요.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남자도 아니잖아요.] 나는 아나이스의 말 사이에 내 감정을 끼워 넣었다. [음...] 아나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당신만 만나고 있겠어요. 난 시간이 별로 없어요.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특수한 상황 이니까 이해하세요.] [우리는 지금 특수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거 잘 알면서 왜 이래?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냐구? 지 금이라도 어서 나와요.] 곽 재원의 말투는 항상 이랬다. 앞에 하는 말은 모두 반말인데 끝에 가서는 존댓말을 했다. 곽 재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에 내 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곽 재원의 전화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그러고보 니 곽 재원과 전화로 얘기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전화 목소리로만 따지자면 곽 재원은 몰상식하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 되먹은 여자였을 뿐이다.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수화기를 입에 바짝 대고 말했다. [이보세요. 곽 재원씨. 누구한테 반말을 찍찍거리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가 당신 부하라고 생각하나 본 데, 냉수 마시고 속 차리 슈.] 수화기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곽 재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어... 정말!] 내친 걸음이었다. [정중하게 나와주십사 해도 나갈까말까 하는 판국에 어디다 소릴 질러댑니까? 당신 집에서 그렇게밖에 못 배웠습니까?] [아니... 점점. 야!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 버렸다. 나는 흥분해 흐트러진 곽 재원을 떠올리며 마치 컴섹을 할 때 같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꼭 곽 재원이 강간당해 찢어져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채 바지춤을 올리며 걸어가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해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보물이나 되는 양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전화가 아니었다면 절대 곽 재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을게다 . 기분이 째졌다. [좋아요. 결심했어요.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지도 다른 누군가를 찾아다니지도 않겠어요. 대신 당신이 내가 찾는 그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해요. 분명히 당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될 거에요. 그래도 좋아요? 오늘 안으로 대답해 주세요. 기다리겠 어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대화방을 빠져 나갔던 아나이스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아나이스가 어떤 사람을 찾는 건지 감을 잡을 길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감당하기 힘들다고 스스로 단정을 지었을까? 정부가 되어 달라는 건가? 아님, 남편 뒷조사를 해 달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남편의 재산을 가로채는 걸 도와 달라는 걸까? 영화에 나올 법한 얘기는 다 머리에 떠올려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도 많은데 뭘...] 나는 아나이스의 편지를 저장해 둔 후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얘기는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말해 보십시오. 오늘 안으로 말입니다.] [오늘 안에 결정을 내려. 내일이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아. 내 말 알겠어요?] 나는 멍청하게도 집에 꼼짝 말고 있으란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곽 재원의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을 보고 야 알아 차렸다. 곽 재 원은 현관 문을 열어주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나는 또 주눅이 들고 말았다. 곽 재원은 검은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맥 라이언 스타일의 커트 머리. 작고 흰 얼굴. 연한 자주빛으로 칠한 도톰한 입술. 그린 듯 가는 눈썹. 잘룩한 허리를 강조하는 자켓에는 금박 단추 둘이 달려 있었고, 브이 자로 가슴이 깊게 패인 흰색 브라우스를 그 안에 입고 있었다. 무릎에서 한 10센티미터는 올라갔음 직한 짧은 치마는 엉덩이에 딱 붙어 있었다. 그리고 초록빛이 감도는 스 토킹과 검은 하이힐. 나는 잘 훈련된 웨이터처럼 공손하게 곽 재원을 간이 식탁으로 안내했다. 곽 재원은 고개를 쳐 든 채 방 안을 휘 둘러보며 걸었 다. 식탁에 달린 의자가 곽 재원의 엉덩이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여 걱정이 앞섰다. 곽 재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엉덩이 를 쓸어내리며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커피를 끓이려 고 가스렌지 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곽 재원이 불러 세웠다. [커피 마시러 온 게 아니야. 여기 앉아요.]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내가 당신 마음 모를 줄 알고 그래?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 당신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야. 다 나 때 문이란 거 알아. 그동안 괴로왔겠지. 하지만 우린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실수를 해 본 적이 없어. 당신이 지금 그런 내 경력에 먹칠을 하려고 하고 있어. 회사로 봐서도 그렇 고 내 개인적으로도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