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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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2 05:35 조회 581회 댓글 0건본문
한 낮의 뜨겁던 태양이 서산에 꼬리를 감추기가 무섭게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변해 버리고 회호리 같은 바람만이 차갑게 다가왔다. 늦둥이 작은 잠자리도 어둠을 따라 날개짓하며 서둘러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는 시간이다.
“어휴, 시간이 겨우 여섯시밖에 안됐는데도 깜깜해지네.” 사방을 둘러보며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동짓날까진 계속 해가 짧아지겠지?” 침묵 속에 터진 그 사람의 말이 사라지면 또 다시 너무 오랜시간 동안 둘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을 질식같은 시간이 두려워 나는 서둘러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받았다.
“정말 날 기다렸던거야?” 꺼지는 한숨 소리와 함께 형식도 말을 애써 부뜰어메고 있었다.
“한번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거든.”
“정말 기다려줬구나?”
“그 날은 특별했었으니까.”
“언제?”
“정말 기억안나?”
“아무리 더듬어봐도 평범한 일들뿐이라서...”
“아냐, 그 날은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었어.”
“그랬다면 다행이네. 적어도 너한테만큼은 평범하고 싶었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이십년이 넘게 흘러가 버린 시간 속에 꼭 전하고 싶던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토록 찾아헤메던 지난 날들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는 강바람 보다 여전히 무뚝뚝한 형식의 태도에 시린 설움을 느껴야했다.
“나, 추워.”
형식의 팔소매를 살짝 잡아끌어 허리에 감기도록 팔을 둘렀지만 형식은 곧바로 팔 힘을 빼고 툭떨어뜨리며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었다. 순간 떨어지던 그의 손이 내 엉덩이를 스치듯 지나갈 때 날카로운 쾌감이 머리를 파고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말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감미롭게 여자를 후리는 재주를 타고 나지 않았을 형식으로부터 사랑의 연가를 듣기를 바라지도 않았었다. 그냥 “사랑해!” 라는 말 한마디 없이 보냈던 젊은 시간이 미련처럼 남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 예뻐?”
“응.”
“안아주면 안돼?”
그제야 형식은 내 어깨를 팔로 감싸며 살포시 자신의 몸 쪽으로 나를 끌었다. 내 몸은 또 한차례 전율하며 행여 형식이 팔을 풀면 어쩌나하는 조바심에 바짝 몸을 붙였다. 아직 잘록한 허리라든가 쳐지지 않고 팡팡한 엉덩이만 보면 어딜가도 삼십대 미시로 통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늘어가는 잔주름이라든가 조금씩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를 느낄 때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에게만 메달려 보냈다는 분한 마음에 미움이 딱지처럼 내 맘속에 달라붙어 있었다.
“넌 날 갖고 놀았던거지?”
“왜?”
“한번도 사랑한단 말은 안했잖아.”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왜 떠났어?”
내가 형식을 처음 만난 것은 전동차 안에서 였다. 까까머리를 막 벗어난 상고머리쯤 되는 짧은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모자를 푹 눌러쓴 그가 이리저리 사람들 틈에서 밀리다가 순간적으로 등이 떠밀리며 내 치마위로 코를 박듯 고꾸라지고 말았었다. 어찌나 얼굴이 발갛게 변하며 민망해 어쩔줄 모르는 그를 위해 나는 황당한 일을 애써 모른척 외면하며 헛기침만 두어번 했을 뿐이었다. 콩나물같은 전동차 안에서 몸싸움에 밀려 코를 박는 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니지만 그토록 난감해하던 얼굴을 생각하면 아직도 순진한 남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일 손이 조금만 한가해져도 눈 앞에 그 날의 일들이 선하게 떠 올랐다. 그 날이 있은 후 한달쯤 지나서였다. 신입사원 연수 중인 직원 중 한명이 우리사무실로 배정될 것같다는 소물이 돌았다. 키도 크고 핸섬하다는 소문도 함께 돌자 여직원들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서로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안녕하세요. 이형식입니다.”
굵직하지만 아직은 날카로운 앳된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꾸벅 인사하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누구?”
“저, 이번에 새로 입사한 이형식입니다.”
바쁘게 일하던 직원들이 머리를 삐끔 내밀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눈 길을 던졌다. 순간 그 사람은 한 달전 내 치마폭에 코를 박고 고꾸라졌던 상고머리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자 직원들의 시선이 이젠 내게로 쏠려버렸다.
“너 저 사람 알아?”
“아니, 그냥 우스워서.”
“왜, 내가 보기엔 핸섬한 것이 경쟁이 치열할 것 같은데?”
“아휴, 난 빼줘. 난 저런 스타일 딱 질색이거든.”
“정말? 그럼 넌 빠지는거지?”
“당근이쥐. 난 관심없어.”
총무주임이 그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직원들 모두에게 인사를 시키고 다녔다. 조금 긴장한 탓인지 얼빠진 얼굴에 넋을 잃은 듯 졸졸 총무주임을 따라다니던 그 사람도 나를 알아봤는지 내 앞에선 바짝 긴장하며 내가 내민 손에 겨우 악수하며 손을 놓았다.
“경미야, 저 사람. 너 한테 바짝 쫄았나봐.”
“그치? 내가 왜 저 딴 사람을 왜 싫어하는지 넌 알겠지?”
“그럼, 그럼. 저런 스타일은 너랑 정말 안어울려. 나라면 모를까.”
“뭐라고? 너 미쳤니? 저 딴 사람을 괜찮게 본거야?”
“너까지 외면한 마당에 저 사람이 얼마나 외롭게 직장생활을 하겠니.”
“하긴, 고로울꺼야.”
신입사원 환영회를 한다며 전직원이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가수 빰치는 노래 솜씨를 뽐내던 부장님이 먼저 숟가락을 소주병에 넣곤 구성지게 흥을 돋구자 분위기가 흠뻑 고조되며 너도 나도 한가락씩 노래를 불러대자 파장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형식씬 집이 어디에요?”
“네, 왕십립니다.”
“전동차에 앉아서 와도 되겠네.”
“아뇨, 전 항상 서서 옵니다.”
“왜죠?”
“유일한 운동이니까요.”
“어머, 무슨 운동인데요?”
“버티기죠. 콩나물시루같이 터질 듯이 밀리는 사람들에게 안떠밀리려고 애쓰다 보면 그게 다 근육이 된다구요.”
“그런데 그날은 나뒹굴었잖아요.”
“재수 없었던거죠. 문 밖에서 메달린 사람들을 밀어넣을 때 가끔 못 버티면...”
나는 왜 이 사람이 그날 나뒹굴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것이 인연인 듯 싶으면서도 우연인 것도 있는 법인데 함께 일하게 된 것이 운명인지 우연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출퇴근하며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았다.
“경미야, 너 어제 회식 끝나고 그 사람이랑 함께 갔다며?”
“재수없게 우리 동네에 산데. 나 어떻해!”
“어머, 그럼 이사해. 첨에 징그런 사람이 나중에도 징그럽거든.”
“내가 왜 이사해? 그 놈이 이사하면 될꺼아냐.”
“같은 동네라면서 한번도 못봤었니?”
“재수없는 소리마라. 나같은 사람이 그딴 놈을 쳐다볼 일 있었겠니?”
“하긴, 경민 미스코리아에 나가도 따 놓은 밥상인데.”
“그치, 그치? 니들이 봐도 나랑 걔랑은 안 어울리지?”
그런 날들을 시작으로 나는 호들갑을 떨며 그 사람을 미워하는데 앞장서기 시작했지만 여직원들은 나 모르게 그 사람에게 점심을 사준다든지 저녁때 슬쩍 호프집엘 데려간다든지 하면서 앞에서는 같이 흉보고 뒤에서는 은근히 나만 따돌리며 그 사람에게 많은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처음 잘못된 시작으로 인해 내 맘속엔 오히려 여직원들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옹호세력이 커질수록 미움만 쌓여가고 있었다.
“내일 등산대회에 참석 못할 사람은 미리 얘기하세요.” 스피커를 통해 총무주임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봉산은 수백번을 더 올랐지만 한번도 물리는 적이 없었다. 세 달에 한번씩 있는 등산대회에 빠지는 어리석은 직원들은 한명도 없었다. 겉으로는 미리 얘기하면 사저을 봐줄 듯 하면서도 막상 빠지려면 단체행동에서 이탈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겠느냐며 윽박지르는 통에 용가리 통뼈가 아닌 직원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모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런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럭저럭 산에 매력을 느낀 나는 이젠 오히려 등산대회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날은 평소 마실 엄두도 못내던 탁주 한사발을 벌컥이며 마시곤 김치 한조각 주욱 찟어 입 속에 넣곤 팔뚝으로 벌겋게 묻었을 고추자국을 훔쳐내는 재미도 있다.
“저, 내일 산에 못갑니다.” 이 형식이었다.
“뭐, 자넨 신입사원이잖아. 벌써 빠진거야?” 총무주임이 난리치며 고함을 쳤다.
“전 일요일엔 다른 일이 있거든요. 입사 조건도 그렇게 적어놨구요.”
“자네 군대 갔다왔지? 까라면 까라는 말도 몰라?”
“암튼 못가는 사람 미리 얘기하라고 하셔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알아서해. 만약 내일 도봉산에서 자네 얼굴이 안보이면 직장인생 끝나는줄 알라고!”
맑은 날씨였다. 차가운 산바람이 도심에 찌든 먼지 덩이를 한거풀 벗겨내듯 가슴 속이 후련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정말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모임 시간이 다 되면 허겁지겁 후회하며 뛰어올 줄 알았었다.
“다 왔죠?”
“이 형식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안왔는데요?” 나는 고자질 하듯 총무주임에게 말했다.
“됐어요. 전직원이 다 온 걸로 치고 등산을 시작합시다.”
여직원들은 배짱이 좋은 사람인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등산대회에 빠진 그 사람을 두고 온종일 산행을 하면서 화두로 삼았다. 나도 앞장서서 그 사람의 나쁜 점만 골라내며 흉을 보고 있었다. 단지 일주일을 함께 생활했었을 뿐인 그에게서 그토록 많은 단점을 골라내는 내가 여직원들 사이에선 적어도 그날 만큼은 최고의 인기였다.
“어젠 왜 안온거야?” 전동차에서 만난 그에게 물었다.
“예, 다른 일이 있었거든요.”
“입사조건이라면서?”
“그럼요. 월화수목금토는 일하고 일요일은 쉬는 누구나의 조건이니까요.”
“등산대횐 다르잖아요. 그건 일하는게 아니니까.”
“그렇죠. 하지만 더 중요한 일도 있는 법이잖아요.”
“하지만 입사한지 일주일밖에 안된 처지에 그렇게 항명했으니 고로울걸.”
“대신 열심히 일해서 미움을 줄여봐야죠. 뭐.”
여직원들은 그렇게 어제 흉을 보며 그 사람을 험담하는데 동조했었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사람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게 관심없는 척하며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말 그 사람이 내겐 하잖은 미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하면 더 멋지게 못난이 그 사람을 험담하며 지낼 것인가가 매일의 숙제였던 것 같았다.
여직원들도 점점 골수분자처럼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나를 중재하려고 몇차례 호프집에 맞대면을 시켰지만 도통 그 사람에겐 좋은 말을 할 건덕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화해를 시키려는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험담만 늘어놓고 말았지만 그 사람은 그저 내 말에 동요하지 않고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그것이 더 나를 화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신 말야. 그렇게 잘난거야?” 퇴근길에 전동차에서 함께 내리며 물었다.
“하하하, 경미씨 맘에서 우러난 대로 그냥 하세요.”
“넌 배알도 없니?” 나는 정말 화가 났었다. 왠만한 사람이면 화를 내며 따저 물었을텐데 이 사람은 빙긋 웃기만 할 뿐 회사에서든 출퇴근 길에서든 한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넌 내가 사람같지 않냐고?” 나는 방방뜨며 메고 있던 핸드백을 집어 던져버렸다.
그 사람은 흩어진 물건들을 간신히 찾아 넣고는 내 어깨에 핸드백을 메어주며 말했다.
“경미씨, 난 알아요.”
“뭘,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화내지 말아요. 내가 사라지고 나면 그 땐 알꺼에요.”
“어딜가는데?”
“멀리. 경미씨가 찾지 못할 곳으로 아주 멀리.”
“흥, 그래라. 네 놈 얼굴 보고 살다가 그런다면 정말 살 맛 날꺼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총총히 핸드백을 메곤 골목길을 향해 걸어갔다. 아마도 우두커니 거친 내 말씨를 곱씹으며 분한 생각에 불끈 주먹을 쥐고 뛰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속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은 결코 뒤 쫒아 오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니 그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전동차를 타고 내리던 날들로부터 이탈되는 첫 번째 날이었다.
“커피 한잔할래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경미씨, 정말 내가 싫어요?”
말을 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들을 자신을 험담하는데 보낸 것을 뻔히 알면서 묻는 의도가 너무나 뻔뻔 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그래요. 난 알아요. 경미씨가 날 왜 미워하는지.”
“알아요? 그럼 잘했어야죠.”
“아뇨. 잘할 수 없어요.”
“그럼 어쩌라구요. 계속 미워하란 말이죠?”
“됐어요. 이젠 커피가 식네요.”
저녁에 다시 전직원이 모였었다.
얼마전 갓들어온 이형식이가 회사를 그만둔다며 함께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경미야, 니가 이겼다 애!”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자 여직원들은 너나 할 것없이 엄지손가락을 나를 향해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내가 이겼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한번 찍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전설과 함께.
“경미야. 불쌍해 보인다 정말.”
“못난 놈을 빨리 솟가내야잖아. 내가 잘한거지?”
“그럼, 그럼.”
나는 사람이 사람을 버린 일에 대한 자책감은커녕 으쓱한 마음에 기분이 너무 좋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두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꾸벅 인사하는 그 사람의 머리통을 보며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 사람은 내게 있어선 우연히 미워하기로 했던 장난감에 불과했었다. 모든 여직원들이 그 사람을 좋아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어떤 여직원도 그 사람에게 정을 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짐은 단촐했다. 서류봉투에 달랑 책 한두권을 넣었는지 홀쪽하기만 했다. 그걸 들고 쓸쓸히 사무실 문을 밀고 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적에게 총탄을 맞고 다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를 바닥에 뿌리며 간신히 목숨을 건지려고 허우적 거리는 그런 모습이었다. 순간 너무 딱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채 헤어질 수는 없었다. 내 행동이 옳았던 글렀던 나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비참해지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 뛰쳐 나가며 외쳤다.
“이 형식씨!”
그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 돌아섰다.
“이 나쁜 놈아. 내게 뭐라 한마디 하면 안돼?”
그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까 들고 나가던 봉투를 내게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가져. 내 모든 것이니까.”
그 사람은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사람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말뿐이었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었다. 다른 여직원들이 혹시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두려웠었다. 모든 험담을 도맡아하며 여직원들의 접근을 막고 싶었다. 그 것은 그 사람이 이렇게 홀연히 나를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기다리겠다. 그 사람이 알겠다고 하던 말의 의미를 이젠 나도 알겠다. 솔직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이 그 사람을 아프게 했었을 것이다.
난 그 사람의 품 안에 안겨 있다.
그 사람도 점차 차가와지는 강바람을 의식한 듯 바짝 나를 안아 세우며 옷깃으로나마 나를 감싸려 애쓰고 있다.
“어디갔던거야?”
“외국.”
“정말 날 잊진 않았던거지?”
“그럼. 그러니까 이렇게 만났잖아.”
책 속에 넣어둔 쪽지 한 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아이를 주렁주렁 낳고 편안하게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쪽지에 남겨진 한마디만 없었다면... [끝]
“어휴, 시간이 겨우 여섯시밖에 안됐는데도 깜깜해지네.” 사방을 둘러보며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동짓날까진 계속 해가 짧아지겠지?” 침묵 속에 터진 그 사람의 말이 사라지면 또 다시 너무 오랜시간 동안 둘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을 질식같은 시간이 두려워 나는 서둘러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받았다.
“정말 날 기다렸던거야?” 꺼지는 한숨 소리와 함께 형식도 말을 애써 부뜰어메고 있었다.
“한번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거든.”
“정말 기다려줬구나?”
“그 날은 특별했었으니까.”
“언제?”
“정말 기억안나?”
“아무리 더듬어봐도 평범한 일들뿐이라서...”
“아냐, 그 날은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었어.”
“그랬다면 다행이네. 적어도 너한테만큼은 평범하고 싶었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이십년이 넘게 흘러가 버린 시간 속에 꼭 전하고 싶던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토록 찾아헤메던 지난 날들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는 강바람 보다 여전히 무뚝뚝한 형식의 태도에 시린 설움을 느껴야했다.
“나, 추워.”
형식의 팔소매를 살짝 잡아끌어 허리에 감기도록 팔을 둘렀지만 형식은 곧바로 팔 힘을 빼고 툭떨어뜨리며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었다. 순간 떨어지던 그의 손이 내 엉덩이를 스치듯 지나갈 때 날카로운 쾌감이 머리를 파고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말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감미롭게 여자를 후리는 재주를 타고 나지 않았을 형식으로부터 사랑의 연가를 듣기를 바라지도 않았었다. 그냥 “사랑해!” 라는 말 한마디 없이 보냈던 젊은 시간이 미련처럼 남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 예뻐?”
“응.”
“안아주면 안돼?”
그제야 형식은 내 어깨를 팔로 감싸며 살포시 자신의 몸 쪽으로 나를 끌었다. 내 몸은 또 한차례 전율하며 행여 형식이 팔을 풀면 어쩌나하는 조바심에 바짝 몸을 붙였다. 아직 잘록한 허리라든가 쳐지지 않고 팡팡한 엉덩이만 보면 어딜가도 삼십대 미시로 통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늘어가는 잔주름이라든가 조금씩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를 느낄 때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에게만 메달려 보냈다는 분한 마음에 미움이 딱지처럼 내 맘속에 달라붙어 있었다.
“넌 날 갖고 놀았던거지?”
“왜?”
“한번도 사랑한단 말은 안했잖아.”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왜 떠났어?”
내가 형식을 처음 만난 것은 전동차 안에서 였다. 까까머리를 막 벗어난 상고머리쯤 되는 짧은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모자를 푹 눌러쓴 그가 이리저리 사람들 틈에서 밀리다가 순간적으로 등이 떠밀리며 내 치마위로 코를 박듯 고꾸라지고 말았었다. 어찌나 얼굴이 발갛게 변하며 민망해 어쩔줄 모르는 그를 위해 나는 황당한 일을 애써 모른척 외면하며 헛기침만 두어번 했을 뿐이었다. 콩나물같은 전동차 안에서 몸싸움에 밀려 코를 박는 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니지만 그토록 난감해하던 얼굴을 생각하면 아직도 순진한 남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일 손이 조금만 한가해져도 눈 앞에 그 날의 일들이 선하게 떠 올랐다. 그 날이 있은 후 한달쯤 지나서였다. 신입사원 연수 중인 직원 중 한명이 우리사무실로 배정될 것같다는 소물이 돌았다. 키도 크고 핸섬하다는 소문도 함께 돌자 여직원들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서로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안녕하세요. 이형식입니다.”
굵직하지만 아직은 날카로운 앳된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꾸벅 인사하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누구?”
“저, 이번에 새로 입사한 이형식입니다.”
바쁘게 일하던 직원들이 머리를 삐끔 내밀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눈 길을 던졌다. 순간 그 사람은 한 달전 내 치마폭에 코를 박고 고꾸라졌던 상고머리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자 직원들의 시선이 이젠 내게로 쏠려버렸다.
“너 저 사람 알아?”
“아니, 그냥 우스워서.”
“왜, 내가 보기엔 핸섬한 것이 경쟁이 치열할 것 같은데?”
“아휴, 난 빼줘. 난 저런 스타일 딱 질색이거든.”
“정말? 그럼 넌 빠지는거지?”
“당근이쥐. 난 관심없어.”
총무주임이 그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직원들 모두에게 인사를 시키고 다녔다. 조금 긴장한 탓인지 얼빠진 얼굴에 넋을 잃은 듯 졸졸 총무주임을 따라다니던 그 사람도 나를 알아봤는지 내 앞에선 바짝 긴장하며 내가 내민 손에 겨우 악수하며 손을 놓았다.
“경미야, 저 사람. 너 한테 바짝 쫄았나봐.”
“그치? 내가 왜 저 딴 사람을 왜 싫어하는지 넌 알겠지?”
“그럼, 그럼. 저런 스타일은 너랑 정말 안어울려. 나라면 모를까.”
“뭐라고? 너 미쳤니? 저 딴 사람을 괜찮게 본거야?”
“너까지 외면한 마당에 저 사람이 얼마나 외롭게 직장생활을 하겠니.”
“하긴, 고로울꺼야.”
신입사원 환영회를 한다며 전직원이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가수 빰치는 노래 솜씨를 뽐내던 부장님이 먼저 숟가락을 소주병에 넣곤 구성지게 흥을 돋구자 분위기가 흠뻑 고조되며 너도 나도 한가락씩 노래를 불러대자 파장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형식씬 집이 어디에요?”
“네, 왕십립니다.”
“전동차에 앉아서 와도 되겠네.”
“아뇨, 전 항상 서서 옵니다.”
“왜죠?”
“유일한 운동이니까요.”
“어머, 무슨 운동인데요?”
“버티기죠. 콩나물시루같이 터질 듯이 밀리는 사람들에게 안떠밀리려고 애쓰다 보면 그게 다 근육이 된다구요.”
“그런데 그날은 나뒹굴었잖아요.”
“재수 없었던거죠. 문 밖에서 메달린 사람들을 밀어넣을 때 가끔 못 버티면...”
나는 왜 이 사람이 그날 나뒹굴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것이 인연인 듯 싶으면서도 우연인 것도 있는 법인데 함께 일하게 된 것이 운명인지 우연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출퇴근하며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았다.
“경미야, 너 어제 회식 끝나고 그 사람이랑 함께 갔다며?”
“재수없게 우리 동네에 산데. 나 어떻해!”
“어머, 그럼 이사해. 첨에 징그런 사람이 나중에도 징그럽거든.”
“내가 왜 이사해? 그 놈이 이사하면 될꺼아냐.”
“같은 동네라면서 한번도 못봤었니?”
“재수없는 소리마라. 나같은 사람이 그딴 놈을 쳐다볼 일 있었겠니?”
“하긴, 경민 미스코리아에 나가도 따 놓은 밥상인데.”
“그치, 그치? 니들이 봐도 나랑 걔랑은 안 어울리지?”
그런 날들을 시작으로 나는 호들갑을 떨며 그 사람을 미워하는데 앞장서기 시작했지만 여직원들은 나 모르게 그 사람에게 점심을 사준다든지 저녁때 슬쩍 호프집엘 데려간다든지 하면서 앞에서는 같이 흉보고 뒤에서는 은근히 나만 따돌리며 그 사람에게 많은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처음 잘못된 시작으로 인해 내 맘속엔 오히려 여직원들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옹호세력이 커질수록 미움만 쌓여가고 있었다.
“내일 등산대회에 참석 못할 사람은 미리 얘기하세요.” 스피커를 통해 총무주임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봉산은 수백번을 더 올랐지만 한번도 물리는 적이 없었다. 세 달에 한번씩 있는 등산대회에 빠지는 어리석은 직원들은 한명도 없었다. 겉으로는 미리 얘기하면 사저을 봐줄 듯 하면서도 막상 빠지려면 단체행동에서 이탈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겠느냐며 윽박지르는 통에 용가리 통뼈가 아닌 직원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모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런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럭저럭 산에 매력을 느낀 나는 이젠 오히려 등산대회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날은 평소 마실 엄두도 못내던 탁주 한사발을 벌컥이며 마시곤 김치 한조각 주욱 찟어 입 속에 넣곤 팔뚝으로 벌겋게 묻었을 고추자국을 훔쳐내는 재미도 있다.
“저, 내일 산에 못갑니다.” 이 형식이었다.
“뭐, 자넨 신입사원이잖아. 벌써 빠진거야?” 총무주임이 난리치며 고함을 쳤다.
“전 일요일엔 다른 일이 있거든요. 입사 조건도 그렇게 적어놨구요.”
“자네 군대 갔다왔지? 까라면 까라는 말도 몰라?”
“암튼 못가는 사람 미리 얘기하라고 하셔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알아서해. 만약 내일 도봉산에서 자네 얼굴이 안보이면 직장인생 끝나는줄 알라고!”
맑은 날씨였다. 차가운 산바람이 도심에 찌든 먼지 덩이를 한거풀 벗겨내듯 가슴 속이 후련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정말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모임 시간이 다 되면 허겁지겁 후회하며 뛰어올 줄 알았었다.
“다 왔죠?”
“이 형식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안왔는데요?” 나는 고자질 하듯 총무주임에게 말했다.
“됐어요. 전직원이 다 온 걸로 치고 등산을 시작합시다.”
여직원들은 배짱이 좋은 사람인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등산대회에 빠진 그 사람을 두고 온종일 산행을 하면서 화두로 삼았다. 나도 앞장서서 그 사람의 나쁜 점만 골라내며 흉을 보고 있었다. 단지 일주일을 함께 생활했었을 뿐인 그에게서 그토록 많은 단점을 골라내는 내가 여직원들 사이에선 적어도 그날 만큼은 최고의 인기였다.
“어젠 왜 안온거야?” 전동차에서 만난 그에게 물었다.
“예, 다른 일이 있었거든요.”
“입사조건이라면서?”
“그럼요. 월화수목금토는 일하고 일요일은 쉬는 누구나의 조건이니까요.”
“등산대횐 다르잖아요. 그건 일하는게 아니니까.”
“그렇죠. 하지만 더 중요한 일도 있는 법이잖아요.”
“하지만 입사한지 일주일밖에 안된 처지에 그렇게 항명했으니 고로울걸.”
“대신 열심히 일해서 미움을 줄여봐야죠. 뭐.”
여직원들은 그렇게 어제 흉을 보며 그 사람을 험담하는데 동조했었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사람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게 관심없는 척하며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말 그 사람이 내겐 하잖은 미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하면 더 멋지게 못난이 그 사람을 험담하며 지낼 것인가가 매일의 숙제였던 것 같았다.
여직원들도 점점 골수분자처럼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나를 중재하려고 몇차례 호프집에 맞대면을 시켰지만 도통 그 사람에겐 좋은 말을 할 건덕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화해를 시키려는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험담만 늘어놓고 말았지만 그 사람은 그저 내 말에 동요하지 않고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그것이 더 나를 화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신 말야. 그렇게 잘난거야?” 퇴근길에 전동차에서 함께 내리며 물었다.
“하하하, 경미씨 맘에서 우러난 대로 그냥 하세요.”
“넌 배알도 없니?” 나는 정말 화가 났었다. 왠만한 사람이면 화를 내며 따저 물었을텐데 이 사람은 빙긋 웃기만 할 뿐 회사에서든 출퇴근 길에서든 한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넌 내가 사람같지 않냐고?” 나는 방방뜨며 메고 있던 핸드백을 집어 던져버렸다.
그 사람은 흩어진 물건들을 간신히 찾아 넣고는 내 어깨에 핸드백을 메어주며 말했다.
“경미씨, 난 알아요.”
“뭘,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화내지 말아요. 내가 사라지고 나면 그 땐 알꺼에요.”
“어딜가는데?”
“멀리. 경미씨가 찾지 못할 곳으로 아주 멀리.”
“흥, 그래라. 네 놈 얼굴 보고 살다가 그런다면 정말 살 맛 날꺼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총총히 핸드백을 메곤 골목길을 향해 걸어갔다. 아마도 우두커니 거친 내 말씨를 곱씹으며 분한 생각에 불끈 주먹을 쥐고 뛰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속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은 결코 뒤 쫒아 오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니 그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전동차를 타고 내리던 날들로부터 이탈되는 첫 번째 날이었다.
“커피 한잔할래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경미씨, 정말 내가 싫어요?”
말을 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들을 자신을 험담하는데 보낸 것을 뻔히 알면서 묻는 의도가 너무나 뻔뻔 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그래요. 난 알아요. 경미씨가 날 왜 미워하는지.”
“알아요? 그럼 잘했어야죠.”
“아뇨. 잘할 수 없어요.”
“그럼 어쩌라구요. 계속 미워하란 말이죠?”
“됐어요. 이젠 커피가 식네요.”
저녁에 다시 전직원이 모였었다.
얼마전 갓들어온 이형식이가 회사를 그만둔다며 함께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경미야, 니가 이겼다 애!”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자 여직원들은 너나 할 것없이 엄지손가락을 나를 향해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내가 이겼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한번 찍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전설과 함께.
“경미야. 불쌍해 보인다 정말.”
“못난 놈을 빨리 솟가내야잖아. 내가 잘한거지?”
“그럼, 그럼.”
나는 사람이 사람을 버린 일에 대한 자책감은커녕 으쓱한 마음에 기분이 너무 좋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두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꾸벅 인사하는 그 사람의 머리통을 보며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 사람은 내게 있어선 우연히 미워하기로 했던 장난감에 불과했었다. 모든 여직원들이 그 사람을 좋아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어떤 여직원도 그 사람에게 정을 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짐은 단촐했다. 서류봉투에 달랑 책 한두권을 넣었는지 홀쪽하기만 했다. 그걸 들고 쓸쓸히 사무실 문을 밀고 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적에게 총탄을 맞고 다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를 바닥에 뿌리며 간신히 목숨을 건지려고 허우적 거리는 그런 모습이었다. 순간 너무 딱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채 헤어질 수는 없었다. 내 행동이 옳았던 글렀던 나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비참해지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 뛰쳐 나가며 외쳤다.
“이 형식씨!”
그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 돌아섰다.
“이 나쁜 놈아. 내게 뭐라 한마디 하면 안돼?”
그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까 들고 나가던 봉투를 내게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가져. 내 모든 것이니까.”
그 사람은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사람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말뿐이었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었다. 다른 여직원들이 혹시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두려웠었다. 모든 험담을 도맡아하며 여직원들의 접근을 막고 싶었다. 그 것은 그 사람이 이렇게 홀연히 나를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기다리겠다. 그 사람이 알겠다고 하던 말의 의미를 이젠 나도 알겠다. 솔직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이 그 사람을 아프게 했었을 것이다.
난 그 사람의 품 안에 안겨 있다.
그 사람도 점차 차가와지는 강바람을 의식한 듯 바짝 나를 안아 세우며 옷깃으로나마 나를 감싸려 애쓰고 있다.
“어디갔던거야?”
“외국.”
“정말 날 잊진 않았던거지?”
“그럼. 그러니까 이렇게 만났잖아.”
책 속에 넣어둔 쪽지 한 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아이를 주렁주렁 낳고 편안하게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쪽지에 남겨진 한마디만 없었다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