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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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2 05:53 조회 887회 댓글 0건본문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3
- 고마워요… -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것 또한 아주 바라고 있던 것 아닌가?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강간이란 행위로 철저하게 짓밟을 즐거움 또한 염두에 두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왜 자꾸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거지?
기식은 슬쩍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그렇다. 이것 또한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그 수년 전 내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줄 대로 주고 나를 차버렸던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예상 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에 대한 짜릿한 긴장감. 절대로 선영이란 년의 그 희망 가득한 웃음에서 싸구려 연민 같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녀석이 무슨 사연이 있든 난 내 복수극만 완결지으면 돼.
그런데… 가만 있자, 내가 그 년을 강간해야 할 정도로 지독한 꼴을 당했었나? 그것 또한 내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아니었을까.
“에이, 씨. 야, 신형준. 그냥 좀 적당히 주문해서 먹음 안 되냐? 뭘 그리 오래 고민하고 있어?”
기식은 생각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아직도 뭘 먹을지 결정하지 못한 형준을 괜히 다그쳤다. 그리고 탁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형준은 형준 나름대로 그때까지 빠져있던 뭔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어… 어, 미안. 기식아. 그러니까… 넌 늘상 먹던 치즈순두부면 되지?”
“이미 말했잖아, 멍청한 자식.”
그리고 기식은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황홀감 비슷한 것을 감지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태 주문도 안 하고 뭘 보고 있던 거냐?”
보통 이런 경우는 더 미안해하면서 서둘러 주문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형준은 반대로 왠지 반가운 빛을 띠면서 상체를 약간 그에게 숙이고는 뒤를 가리키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 모습은 어쩐지 ‘네 전문적인 작업 걸기 실력이 발휘될 좋은 기회’라고 암묵적으로 말하는 듯하다.
“저기, 저 두 여자 이쁘지 않아?”
기식은 이 녀석도 어쩔 수 없이 여자에 목마른 20대 청춘이라고 속으로 긴 한숨을 쉬고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긴 했다. 그래 봤자 대낮에 이런 싸구려 분식집 한 구석에서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여자가 예뻐봤자 얼마나 예쁠…….
그리고 기식은 놀람의 증거로 눈이 커졌다. 물론 형준은 기식의 반응이 당연히 의외의 행운에 따른 반응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기식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 있던 두 여자의 시선과 기식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점차 다급하게 변하였다.
“……?”
뒤를 다시 돌아본 형준은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두 여자 중 한 명은 기식을 보고는 - 당연히 형준 자신을 보고 저런 미소를 짓지는 않을 것이기에 - 호감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여자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어쩐지 경멸까지 담아서 쏘아보는 그녀의 시선에 형준이 당황할 틈도 없이, 기식 쪽이 먼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 아직 주문 안 했지?”
“어? 어… 그… 렇긴 한데?”
“빨리 나가자. 아주머니, 죄송요. 다음에 올게요.”
가게에 있던 몇 안 되는 손님들이 이상한 분위기의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에게 시선이 쏠렸지만, 기식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가게문을 열고 나갔다. 형준은 멍하니 그런 그의 뒤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허둥지둥 자신도 노트북을 챙겨 들고는 분식집을 빠져나갔다.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약간의 해프닝.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꽤 심각한 개인적인 문제.
그래서 겨울이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거리로 내딛어졌을 때 형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한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하다.
“왜 그래? 아는 여자야?”
“신경 꺼. 제기랄. 다른 곳 가지.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초밥집이 있어.”
형준은 분식집의 싸구려 음식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점심을 먹게 되었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그 여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기식이 그런 대단한 미녀들을 놓칠 리가 없는데…. 하긴 그런 여자들이라면 자신 따윈 거들떠도 보지 않고 모두 기식의 차지가 되겠지만. 형준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알 수 없는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나저나 좀 안 좋은 사연이 있는 사인가? 기식답지 않게 왜 이렇게 서둘러 나온 거지?
‘이런 젠장할…. 왜 이 주변에 저 녀석이… 설마 아지트까지 들킨 건가? 그럴 리가 없다. 그저 우연이겠지.’
그런 기식의 생각과 비슷하게 분식집에 있던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 또한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 참 넓고도 좁군. 이런 데서 녀석을 마주할 줄이야…. 지금이라도 쫓아가볼까? 뭐… 그렇다곤 해도 녀석은 악을 쓰며 거부하겠지만…….’
“야, 야. 방금 있잖아. 왠지 모르게 금방 나가버린 금발머리 그 남자. 멋있지 않니?”
소희는 날치알로 돌돌 말린 김밥을 입에 넣으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하영을 찌릿 쏘아보았다. 하영은 황홀한 표정으로 기식을 생각하다가 소희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치, 이 가스나도 남자 좋아하는 페로몬 폴폴 풍기면서 아닌 척 차갑긴. 너 그렇게 너무 튕기면 남자들이 정말로 싫어하는 줄 알고 안 다가와. 요즘 남자들이 얼마나….”
“혼자 김칫국 다 마시는 가스나는 바로 너야. 으휴.”
“내가 뭘?”
소희는 롤을 우물거리면서 천장으로 시선을 주곤 한숨을 폭 쉬더니 고개를 젓고는 다리를 바꿔 꼬아앉았다. 그녀의 미끈한 다리 라인과 풍만한 허벅지는 두꺼운 겨울 스타킹으로도 감추지 못할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고, 주변 남자 손님들의 흘끗거리는 시선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하영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는 그런 시선들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신경도 안 쓰고, 짜증나는 자신의 기분에만 충실하고 있었지만.
“날 보고 나갔다고, 날 보고.”
“어머,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니. 혹시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면 소개 좀 어떻게… 안 될까?”
소희는 그만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곤 소리치듯 말했다.
“넌 저게 멋있니?”
“그으럼~. 당연하지. 키도 크지, 옷빨 잘 받게 생겼지. 차가운 듯하면서 어딘가 따뜻함이 서려 있는 깔끔한 인상. 진짜 밴드부에 메인 보컬하면 딱이겠다. 하아, 내 인생에 저런 남자 한번 사귀어볼 기회 안 오려나.”
뻔뻔스럽게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는 하영의 모습에 소희는 결국 제풀에 지쳐 화를 불발시켜버렸다. 그녀는 다음 롤을 그냥 한입에 확 집어넣고는 툭하고 내뱉듯 말했다.
“보컬 좋아하네. 날라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만. 차라리 김성진 같은 남자가 백배 낫지….”
“어머머, 걔 이름 나왔다. 너 진짜 걔 좋아하는 거 아니니?”
젓가락질을 하던 소희의 손이 멈칫했다. 하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꽤나 기세를 탄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몰아붙였다.
“성진이랑 그 클럽에서 다섯 번이나 했다며, 응? 응? 어때, 걔 잘해? 날카로우면서도 일견 이쁘게 생긴 구석도 있던데, 흐음…. 나도 한번 먹고 싶다.”
“시끄러워. 그 얘긴 그만하라 했지.”
“무슨 얘기? 야한 얘기? 아니면 성진에 대한 얘기?”
소희는 그녀의 몰아붙임을 그냥 한숨으로 흘러 넘기기로 했다. 일견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하이텐션 타입의 하영이었지만 소희의 차분하기까지 한 성격과 중화되었기에 둘은 묘한 친구 관계를 지속시키고 있었다. 하영은 주변 남자 손님들이 들으면 얼굴이 붉어질법한 추궁을 몇 번 더해보다가 반응이 없자 자신도 마저 남은 롤을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왠지 자신의 일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솔직히 그때 성진이 옆에 있던 여자애보다는 니가 낫다야. 미선이라 했던가? 뭐 귀엽긴 했지만서도.”
“시끄럽다니깐.”
“그래도 니가 한번 적극적으로 대시해봐. 남자는 귀여운 여자보다 섹시한 여자한테 끌리는 법이야.”
“그리고 섹시한 여자보다 사랑하고픈 여자한테 끌리는 법이지.”
“섹시한 여자가 사랑하고픈 여자 아니야?”
소희는 한숨 대신 물컵을 기울이며 식사의 끝을 알리듯 짧게 대답했다.
“넌 아직 사랑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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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모레 12일 레케인에서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스피어 게임단의 초기 멤버가 될 예비 프로게이머들과 간단한 미팅 자리를 가질 예정입니다. 보다 세부적인 저희 구단 소개와 계약 조건 등을 간단히 프리젠테이션해서 보여드릴 것이니, 은선영 씨도 참석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문자를 보냅니다… -
‘참여하실 의향이 있다면 답장을 주세요. 정확한 장소를 다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권유에도 선영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가겠다는 답장을 보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갈게요’라고 적어야 하나? 아니면 ‘예, 한번 참여해보고 싶어요’라고 적어야 하나? 전자는 너무 성의 없어 보이니 후자가 나을 건가? 아냐, 너무 평범해. 경망스러워 보이지 않으면서 은근 많은 관심이 있다는 식의 대답을 어떻게…….
예비 프로게이머가 몇 명이나 참석할지에 대해선 선영에게 그다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선영은 그저 미래의 자신의 길을 열어줄 그 멋진 이기식이란 남자를 한번 더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있었다. 물론 당사자는 어디까지나 사무적으로 자신에게 권유하는 것일 테고, 선영도 그 정도는 모르지 않았으나 그녀는 마치 아주 소중한 애인에게 받은 문자마냥 핸드폰을 가슴에 꼭 안아 쥐었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수십번도 더 고르고 고른 답장을 간신히 기식에게 전송하였다.
‘이건 운명이야….’
그렇게 생각한 선영은 문득 원룸 한 구석에 놓인 조그마한 상자에 눈길이 갔다. 우연히 그것을 보게 된 그녀는 별 특색 없는 그 상자의 내용물 - 정확히는 그 안에 들어있었던 - 을 떠올렸다. 나 참, 창오빠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하긴, 생각이 많은 만큼 보다 깊은 내면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나저나 창오빠답지 않게 ‘수호천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다니, 참…….
태환이 ‘네 수호천사’라며 택배로 보내온 물건은 의외로 작고 간단한 것이었다. 선영은 문득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알 수 없는 따뜻함과 애틋함 비슷한 것이 섞여있는 순수한 감정. 물론 그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선영은 모레에 입고 나갈 옷을 어떻게 세팅할지에 대해 궁리해보기 시작했다. 예비 프로게이머들이라니 분명 남자들로 구성됐을 테고 그 사이에서 너무 튀어보이지 않으려면 약간 수수한 복장이 알맞으려나? 그러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현재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기식을 만난다는 것과 주의를 조심스럽게 끌어내본다는 전략으로 가득 들어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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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할 때 즐거워질 수 있다는 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특권 중 하나다. 덧붙여서 거기에 함께 하는 상대, 특히 이성친구란 존재가 있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하지만 지금 이 고급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윤아람이란 청년은 아주 맛있는 요리가 나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더군다나 함께 앉아있는 아주 예쁜 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넘어야 할 난처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물론 그의 표정은 거의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일부러’ 그런 표정을 만들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히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여자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메뉴판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을 쿡 찔렀다.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요, 아람 선배.”
“어? 어… 하지만 이게, 그게… 흠.”
“나 때문에 여기 오기도 한 거니까 비용도 다소 저도 부담해야죠. 반반씩 내기로 해요, 어때요?”
그제서야 묶인 무언가가 풀어지듯 아람의 표정도 밝아졌다. 물론 자신이 점심을 산다면서 불러내었으니 모든 비용을 부담할 각오를 했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한 이 더치페이의 제안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그는 이 감정을 내색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으로 얼른 표정을 고쳐 잡았다. 비싸다고 해봤자 고작 몇만원짜리의 이 점심 식사에 주눅들면 안 된다. 찌질하게 보이잖아.
“그럴까? 음… 뭐, 미선이 네가 편한 데로 하는 게 가장 좋겠지. 그러면….”
비용 문제를 자연스럽게 어물거리며 넘어가려던 아람은 문득 앞에 앉은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미선의 머릿속은 음식 비용에 관한 생각 따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레스토랑 내부의 인테리어라도 감상하듯 두리번거리고 있달까.
아람은 그 무관심하기까지 한 태도에 이번엔 가슴 한 구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내가 비용 문제로 곤란해지지 않게 일부러 신경을 끄는 척하고 있구나.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진짜 천사야, 천사. 아람은 반드시 이 귀여운 여후배를 자신의 애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이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서도 2년이 다 가도록 변변한 여자친구 하나 사귀어보지 못했는데, 이 후배하고는 어쩐지 잘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런 아주 보편적이고 흔한 착각에 빠지도록 내버려둔 미선은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실 조금만 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녀의 눈은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감상한다기보다는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봐야 맞을 것이었다.
‘올 때가 됐는데…….’
그리고 아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녀의 행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점을 짚어낼 수 있었다. 누굴 기다리나? 이윽고 미선의 시선이 레스토랑 입구에 고정되었다. 그에 따라 아람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입구 쪽을 향한다. 두 남녀가 바라보는 그곳에는 역시 두 남녀가 웨이터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눈에 봐도 이미 애인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듯한 알콩달콩한 분위기의 연인.
남자 쪽은 약간 슬림해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특유의 날카로움이 서려 있는 청년이었고, 여자 쪽은 엄청난 미모에 얼핏 보기엔 간편한 차림 같으면서도 어딘가 화사함이 돋보이는 센스 있는 코디를 하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 모델로 활동해도 손색이 없을 그 미모에 아람도 순간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남자 쪽을 다시 바라본 아람은 그 남자가 그다지 밝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저 남자도 역시….’
확실했다. 비단 아람뿐만이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이 비싼 레스토랑에 들어오기 꺼려하는 모습이다. 남자는 살짝 궁시렁거리기까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옆의 여자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그런 남친을 달래려 찰싹 달라붙어 아양을 떨고 있었으니. 그런 장면은 어떻게 생각해도 ‘비용’의 문제가 가장 확률이 클 것이었다. ‘오빠, 나 저거 먹고 싶어’, ‘비싸잖아. 무슨 점심을 그렇게 거창하게 먹으려 해’, ‘우웅, 그래도 먹고 싶단 말야. 한번만 사줘, 오빠, 응? 오빠아~’. 그러면 남자는 ‘아 거참, 돈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자의 조름에 못 이겨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추리를 전개해나가며 아람은 다시 한번 미선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그러니까 방금 들어온 연인인 성진과 혜진은 그 문제의 조금 다른 형태로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특이한 것이었다. 성진은 웨이터가 안내한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고 혜진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 오빠를 달래었다.
“그러니까… 인상 좀 풀래도. 오빠가 불편한 거 잘 이해해.”
“여기 음식이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다음엔 오빠가 내면 되잖아. 난 그때 아예 지갑도 놓고 올거야.”
“다음에, 다음에… 너 그 소리만 정확히 8번째다.”
“어머, 벌써 그렇게 됐어? 근데 심하다…. 그걸 다 세고 있었어!”
“도대체가… 대부분의 남자들이 애인한테 뭘 선물하거나 식사를 사주면서 뿌듯해하는 이타적인 감정을 너한테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을 것 같단 말야. 하긴, 이제는 용돈까지 받는 처지니 내가 지불한다고 해도 애초에 그런 감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겠지만.”
혜진은 그런 오빠의 질책(?)을 얼버무리기라도 하듯 얼른 메뉴판을 집어 들어 성진에게 건네었다.
“그…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 내가 오빠한테 뭘 해줌으로써 내가 즐거워질 수 있단 말야. 그럼 오빠는 내 즐거움을 돕는 셈 치고 그냥 계속 받아줘. 응? 날 위해서, 날 위해서.”
성진은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모든 것에 관대한 이 녀석도 이상스런 곳에서는 고집이 세다. 그간 혜진과의 연애를 통해 나름대로 대응법을 세운 거라면, 그저 그녀가 베풀면 베푸는 대로 다 받아주는 게 서로간에 가장 좋은 방향이다. 물론 미안함이나 자괴감 따윈 느끼지 않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야 한다.
성진은 예전 연애 때 겪었던 난감함과는 완전히 상반된 난감함에 여전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못해 메뉴판을 살펴보기 시작한 지금도 연이어서 몰려오고 있었다.
“뭐 먹을래, 오빠?”
성진은 그렇게 묻는 혜진을 부담스러운 듯 곁눈으로 흘끗흘끗 바라보며 섣불리 선택하지 못했다. 적당히 싼 것으로 먹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었지만 혜진은 절대적으로 비싸고 좋은 음식을 오빠가 먹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온갖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이 너무도 초롱초롱하고 강렬해서 성진은 차마 사양이고 뭐고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간신히 그녀의 바람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자신도 어느 정도 양심의 가책을 상쇄시킬 ‘적당선의 비싼 메뉴’를 고를 수 있었다.
“이거? 가격이 좀 그런데. 모처럼 왔는데 좀 더 비싼….”
“난 지금 이게 제일 먹고 싶어.”
성진이 자신의 식성을 확고히 굳히고 나서야 혜진은 활짝 웃으며 수락(?)했다. ‘오빠가 먹고 싶다면 좀 싼 것이어도 어쩔 수 없지’. 성진은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혜진을 바라보며 왠지 알 수 없는 두통이 몰려옴을 느꼈다. 눈가를 부여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려던 성진은 문득 혜진이 묘한 표정으로 한쪽을 응시하는 것을 발견했다.
“……?”
성진은 미간까지 올렸던 손을 내리면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순간 성진의 표정은 혜진보다 더 미묘하게 변했다(그래서 누군가의 딴에는 경악처럼 보일 것이었다). 상황을 몸으로 인지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는 법이고, 그래서 성진은 잠깐의 사이 후 몸을 화들짝 떨었다.
어느 새 테이블 바로 옆까지 다가온 미선이 평온한 미소를 띤 채로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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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