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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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2 05:53 조회 889회 댓글 0건본문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2
“이쁘다.”
“이쁘지?”
혜진은 방 한가운데에서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엉덩이로 모아 쥐고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굽혀서 성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가끔씩은 이렇게 귀여운 복장도 해줘야 오빠가 질리지 않지.”
“야, 야. 너라면 1년 365일 같은 복장이라도 안 질리겠다.”
“우웅~. 아냐. 아무리 이쁘거나 서로 좋아서 못 견디는 사이라도 시간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대. 권태기가 온다는 거지. 그보다 오빠.”
“음?”
“오늘은 왜 이렇게 립서비스가 좋아?”
성진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난감한 기분이 들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고, 그래서 혜진은 그냥 좋은 걸 그대로 받아들일 걸 그랬나 하는 일말의 후회가 일었다. 그 기분을 주체하지 못해서 역공격을 하다니 나도 참. 그래서 혜진은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 전에 그녀가 아주 자신 있는 방면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흐음, 역시 아침의 섹스가 하루의 활력소에 도움을 주는 건가? 그렇게 기분 좋았어, 오빠?”
효과는 있었다. 약간 발끈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무… 무슨 소리야? 네가 좋아서 시작한 거 아니었어?”
“당황하는 걸 보니 맞나 본데. 오빠, 이제부터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가볍게 한번씩 꼭 하자.”
“절대 노. 제발 좀 봐주라. 이 오빠도 한계가 있어.”
“히잉. 좋으면서 뭘. 오늘 아침도 엄청나게 많이 내었더만.”
그리곤 성진이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혜진은 슬쩍 한걸음 다가왔다. 성진이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것도 잠시, 혜진은 킥하고 웃고는 노란 블라우스 밑자락을 붙잡고 위로 걷어올리며 자신의 배를 만지는 시늉을 해본다.
“이것 봐. 내 자궁 안에 오빠의 정액이 가득 출렁출렁♪”
하지만 이번의 성진은 당황하지 않았다(물론 붉어진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회피하곤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어느 에로게(Ero Game)에 나오는 대사냐?”
“어, 눈치챘어? 이야~. 많이 발전했네, 오빠?”
하지만 성진은 되려 민망해진 표정으로 헛기침만 하며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정작 혜진은 신이 나서 태연하게 음란한 말을 이어갔지만.
“꽤나 인상적인 문구라 언젠가 한번 써먹어보고 싶었는데. 근데 오빠가 내 안에 싼 여운이 남은 상태로 이 말을 하니까, 또 되게 야하게 느껴진다. 헤헤헷.”
성진은 아예 그녀로부터 등을 돌리고는 바깥 경치를 다시 바라보는 척했다. 혜진의 말에 또다시 자지가 다시 서버리는 것을 제지하기 위한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지만, 이미 오빠의 행동반경을 손바닥 안에 꿰고 있는 혜진은 키득거리며 그에게 밀착해왔다. 혜진은 뒤에서 그를 살포시 안듯 젖가슴을 갖다 대고는 손을 앞쪽으로 뻗어 바지 위로 자지를 살살 매만져본다. 온갖 딴 생각에 안간힘을 집중하던 성진에겐 꽤나 애처로울 법하지만 이미 자지는 주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꼿꼿이 치솟아있었다.
혜진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성진 어깨에 기대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숙박 연장시키고 실컷 하면 안될까, 오빠?”
“안 돼. 나중에 너희 집에서 하든지 해.”
“거기랑 이런 데서 하는 거랑 분위기가 또 다르잖아.”
“넌 무슨 여행을 섹스 목적으로 오냐?”
“히이이잉. 오빤 참 이상해. 다른 남자 같으면 자기가 숙박비 지불해서라도 여자친구를 더 붙잡아둘 텐데. 이건 뭐 여자가 다 대준다 해도 거절하니.”
“네가 보통 여자냐?”
혜진은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고는 결국 물러섰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쉬움을 담은 채 시선을 성진의 아랫도리로 계속해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전환시켜버리기라도 하듯 성진은 다리를 꼬아 창가에 걸터앉고는 한숨처럼 말했다.
“얌마, 강혜진. 나 어디 안 간다. 앞으로 할 날은 많아. 또 여행 와서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만 좀 아쉬워해.”
“그렇겠지?”
혜진은 마지막으로 침대의 탄력성을 느껴보려는 듯 폴짝 뛰어서 시트에 걸터앉았다. 성진은 여전히 창가에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혜진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당연하지. 너같이 이쁘고 내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최고의 애인을 놓쳐버리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자살하고 싶어질 정도로 허무해질 걸? 뭐 종종 과도한 섹스를 요구해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네 매력이고, 늘 딱딱하게 내가 반응해도 그것이 진심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너도 잘 알잖아.”
혜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성진은 좀 부끄러운 듯 그녀의 시선을 약간 피하며 볼을 긁적이곤 말했다.
“뭐 사귄지 아직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고, 나이로 봐서도 상당히 이르지만… 난 너와의 결혼까지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어.”
“오빠…….”
혜진은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흘릴 듯 성진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성진의 예상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진은 그녀의 진심 어린 기쁨에 조금 묘한 감정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곤 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봤나? 그렇게 성진이 추측해보고 있을 즈음, 툭하고 열리는 혜진의 입.
“난 정말 이 순간만큼은 오빠의 여자인 게 축복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무 행복해…. 그런데 오빠, 오빠는 나 때문에 자살하고 싶다거나 그런 허무감을 느낄 필요 없어.”
“물론 헤어지지 않으면 그만이란 네 맘, 잘 알아.”
“아니, 설령 헤어진다 해도.”
성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곧바로 물어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만약에 오빠랑 내가 헤어진다 해도 오빠는 그 사실에 그 어떠한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거란 거야.”
성진은 약간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 좀 이상한 얘길 한다? 네가 내 마음을 조종이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너는 견딜 수 있겠어?”
“체크아웃 시간 다 됐다. 오빠, 얼른 나가자.”
성진의 귀엔 그 말이 답을 얻을 수 있는 잔여 시간의 커트라인을 넘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혜진은 마치 아무 얘기도 없었다는 것처럼 활기차게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는 짐과 외투를 챙겼다. 도대체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데 어떻게 아무 마음의 상처도 생기지 않을 수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성진은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렇든저렇든 성진은 혜진이 여전히 자신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혜진과 헤어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녀의 말도 안 되는 방금의 얘기는 아무 의미가 없지. 성진은 그렇게 단정짓고는 자신도 창가에서 일어서서 외투를 챙기고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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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은 기분이 매우 불편했다. 물론 기식은 그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당했다. 덕분에 형준은 자신의 해커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여러 흥미로운 정보를 끌어 모으는 희열감에 한껏 도취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자신을 하인 부리듯 아무렇게나 대하는 기식의 태도마저도 감수할 정도였기에, 사실상 그 둘의 사이에서 심각할 정도로 기분이 불편해질 계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식이 데리고 있는 다른 패거리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과 형준의 사이는 아무런 상조의 관계가 없었고, 그저 기식과 연결된 공통점 외에는 그 어떤 동업자적 분위기도 형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거실에서 노트북에 얼굴을 박고 후줄근하게 작업하고 있는 형준의 꼬락서니를 마음껏 조롱할 수 있었다.
“신형준이라 했나? 공돌이들은 다 그 모양이냐? 어휴, 차라리 길거리에서 노점판매를 하는 80살 노인이 더 세련되어 보이겠다.”
“고… 공학도를 우습게 보지 마.”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있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형준의 이러한 대응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우게끔 했을 뿐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한창 지루한 낮시간에 난데없는 오락거리를 발견한 듯, 불량배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흑인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그를 발로 툭툭 건들면서 빈정댔다.
“야, 너 오타쿠라고 아냐? 요즘은 오덕후라 하던가? 아무튼 너같이 여드름 득실하고 범생이 같은 안경에 모니터 미소녀에다 시선을 집중한 채 실실거리는 모습이 딱 그 표상이란 거야. 뭐 뚱뚱하지는 않다는 점과 미소녀 대신 이상한 프로그램 소스를 만지고 있다는 것은 다르긴 하지만.”
곁에 있던 레게 머리의 남자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근데 너 여자는 사귀어봤냐?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여자랑 잠자리는 같이 해봤냐?”
“야, 야. 뭐 그런 잔인한 질문을 건네고 있냐? 크크큭.”
“아니, 이런 녀석들은 자신감이 제로라서 현실 여자한텐 말도 못 건넨다니까. 그래서 맨날 모니터 속 2D미소녀만 보면서 하악대고 자위하지.”
“우와, 기분 나빠. 불쌍하고 기분 나쁘다. 크하하하핫….”
형준은 그의 전용(?) 작업실 쪽방에 있지 않고 굳이 거실로 나와서 노트북을 켠 것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보일러의 단열재는 쪽방에까진 제대로 설치되어있지 않았고, 그래서 보다 따뜻한 거실로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처음엔 형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불량배 패거리들도 무료함이란 나태가 쌓여가자, 그에게 반갑지 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형준은 현재 작업하는 것만 얼른 마치고 다시 쪽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충전 플러그를 뽑아들었다.
불량배들의 험담은 계속되었다.
“요즘 시대에 IT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드물 정도지. 그래서 나도 관련 뉴스를 종종 보는데 말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더라고. IT업체는 결혼난도 심각하대. 여자가 갖는 직종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점도 별로 없고, 그래서 여자랑 어떻게 사귈지도 모르고 그냥저냥 나이만 먹는 패턴이 반복되는 거지. 고생은 또 얼마나 죽도록 하는데. 중소기업 같은 경우는 추가 수당도 못 받고 밥먹듯이 회사에서 야근만 하다가 수명까지 갉아먹는다나?”
“왠지 저 녀석의 인생과 오버랩돼서 내 가슴이 다 쓰라린다. 후우…….”
“끌끌끌끌…….”
형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탁소리 나게 닫았다. 자기들끼리 한껏 담소(?)를 나누던 불량배들은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집중했고, 형준은 그 시선에 기가 꺾이기라도 하듯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숨을 들이키곤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직업도 없이 방탕한 짓거리들을 일삼는 녀석들의 말을 듣고 싶진 않군.”
“크핫하하…….”
다시 한번 비웃는 웃음소리가 그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갔다.
“우린 뭐 천년만년 돌아다닐 들개처럼 보이냐? 뭐하러 저런 재수없는 기식의 계획에 그대로 따르는데. 어이, 샌님 아저씨. 얼굴도 못생겼으니 샌님이라 하기도 뭣한가? 아무튼 요즘 세상은 말야. 주먹이 전부가 아냐. 돈과 정보가 권력을 잡는다고. 그래서 우리가 기식 녀석을 따를 수밖에 없는 거고. 너도 정보통으로 얽혀져 있으니 그런 건 잘 알 거 아냐?”
“십몇 년 전만 해도 형준이. 저런 타입은 참 아무 쓸모도 없이 낙오자가 됐을 텐데, 그래도 요즘 세상이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곤 해도 별로 녀석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진 않군. 어이, 오덕후. 이쪽이 좀 더 네녀석한텐 맞는 호칭이겠군. 잘 들어둬. 낮에는 푼돈이나 벌고 밤에는 클럽에서 죽치는 우리 같은 인간들도 말야. 다 비전을 바라보고 하는 거라고. 너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넝마주이 같은 인생이 아니란 말야.”
“무엇보다 재미가 있잖아. 크큭…. 기식이 좀 재수없긴 해도 흥미로운 일을 잘 벌이거든. 강간에 조리돌림 계획이라니, 이래서 나도 이 일을 쉽게 끊지 못한다니까.”
입술을 떨며 그들을 노려보던 형준은 혐오스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결국 너희들은 더 많은 보수와 더 흥미로운 일거리가 생기면 기식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거군?”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리가 녀석과 무슨 동고동락하는 친구 사이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철저한 계약일 뿐이지.”
“쓰레기 같은 넝마주이 인생 맞네.”
‘뭐야?’하고 인상을 쓰거나 험악스러운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았다. 그럴 틈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던 약간 간사하게 생긴 사내가 표정변화 하나 없이 재떨이를 집어 들어 형준에게 던졌다. 번개 같은 솜씨였다. 스텐레스로 된 재떨이는 형준의 귀를 스치며 뒤편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치고 튕겨져올랐다.
어찌나 거세게 날아갔는지 벽에 움푹한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슬쩍 뒤를 돌아본 형준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불량배들 중 한 명이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하지만 약간 잔인함이 담겨있는 눈빛으로 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계획을 진행하는 중에는 동료랑 피를 보아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건들진 않지만, 끝나고도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거든. 기식도 너무 믿지 마. 일이 끝나면 네깟 녀석이야 어떻게 되든 그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형준은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슬쩍 웃었다. 재떨이를 던졌던 사내는 물론이고 다른 불량배들까지도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형준을 바라보았다. 너무 겁을 줘서 저 자식이 돌았나? 그런 반증으로 여기고 있을 즈음, 거실 한쪽의 문이 열렸다.
마치 분위기가 환기되기라도 하듯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뭐야?”
방에서 나온 기식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재떨이와 형준, 그리고 불량배 패거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준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고, 불량배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가 먼저 시비건 게 아니야’라는 투의 제스처를 능숙하게 표현했다. 기식은 물끄러미 형준을 쏘아보다가 방문 앞으로 다시 돌아가 경희가 있을 안쪽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마디 건넨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그의 옆구리를 발로 툭하고 건드렸다.
“일어나. 멍청한 녀석.”
“어… 어, 기… 기식아. 내가 소란을 피운 게 아니야. 여기서 작업하는데, 이… 이 녀석들이 먼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어? 어…… 어, 그래.”
형준은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며 허둥지둥 노트북을 챙겨들고는 기식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걸어갔다. 둘은 피식거리는 불량배들의 비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낡은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단지의 입구를 지날 때 형준은 질린 표정으로 아파트를 흘끗흘끗 돌아보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야, 기식아…. 계획에 만반의 준비를 위해서라곤 해도 꼭 저딴 녀석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거야? 나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기식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로 문자를 보내며 그런 그를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마치 그런 질문 따윈 너무나도 당연하게 예상했던 것처럼.
“오히려 저런 녀석들이니까 믿고 맡길 수 있는 거지. 돈 되고 흥미가 돋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수행하는 타입이니까. 또 녀석들의 범죄적인 전적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도 만에 하나 경찰에 신고하는 일 또한 없어. 세상의 어느 누구를 강간의 계획에 쉽게 동참하게 할 수 있겠어?”
“하… 하지만…….”
기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핸드폰 문자 버튼을 누르면서 형준의 불안에 못박아버리듯 내뱉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그렇잖아? 거사를 위해서는 조직폭력배와도 손을 잡는다고. 뭐 거사라 하기에도 좀 거창한 면이 없진 않지만 우리에겐 물리적인 압력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 해. 뒤끝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 너는 물론이고 녀석들한테도 아무 불만이 없을 만한 거액의 보수를 보장할 테니까. 우리 아버지가 UKS사의 이사인 것,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누구나 한번쯤은 선망의 대상이 될 대기업의 명칭에, 그저 일시적인 동업자적 관계에 있는 형준마저도 위축돼있는 어깨를 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이젠 일일이 비웃어주기도 귀찮은 듯 기식은 핸드폰을 바지주머니에 도로 꽂아 넣음과 동시에 분식집의 문을 열어젖혔다. 기식은 자리에 앉자마자 늘 먹는 치즈 순두부를 시키라고 요구했고, 보다 금전적 여유가 없는 형준은 이 기회에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메뉴판을 면밀히 훑어보았다.
기식은 그가 주문하길 기다리다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서 받은 문자함을 확인했다. 아직 답장이 도착하지 않았다. 기식이 문자를 보낸 상대는 다름 아닌 선영이었고, 그녀가 약간 고민하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기식은 별로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고민이란 것도 대답 자체라기보다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승낙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이겠지. 선영은 현재 기식의 의도대로 너무나도 손쉽게 행동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식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누구도, 수완 좋은 기식 자신까지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도 같았다.
“…….”
기식은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그 선영의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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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